[삶의 이야기] 88 생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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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수프(외손녀 최혜란의 글)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댁에 놀러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할머니 댁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많았고, 집도 너무 깨끗했고, 이불에 누우면 금방 빨래한 듯 포근하고 향긋한 비누 향이 나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어릴 적 그리 예쁘지도 않았는데도 항상 예쁘다고 칭찬해주시고 뭐든 잘한다고 해주셔서 할머니 댁에만 가면 공주님이 된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항상 할머니 댁에 가자마자 내가 찾았던 건 시원한 보리차였다. 우리 집에서 아무리 똑같은 보리차를 끓여 먹어도 할머니 댁 보리차 맛이 나질 않았다.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세상에 그 어떤 음료수 중에서도 할머니 보리차가 제일 좋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탄산음료나 과일 주스보다 보리차를 더 좋아한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옛 추억을 회상하시면서 너희들이 참치 샌드위치와 닭 다리 요리를 아주 좋아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두 가지 요리 모두 내가 정말 좋아하는데 할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할머니 요리는 따로 있었다. 바로 ‘크림 수프’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도시체험학습’이라고 할머니 댁에서 한 달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크림 수프’를 너무 좋아해서 혼자서 한 냄비를 만들어 먹곤 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 먹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어린 마음에 몰래 혼자서라도 만들어 먹으려고 크림 수프 몇 봉지를 사서 식탁 한구석에 놨었다.

다음 날 학원을 마치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에 퍼진 구수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내가 사다 놓은 크림 수프를 보시고는 어떻게든 해주고 싶으셔서 내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끓이셨던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처음 해보는 음식인 데다가 설명서 글씨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드셨을 텐데도 그저 손녀를 위해서 열심히 만들어 주셨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큰 감동이고 놀랐는데 오히려 물양을 못 맞춰서 너무 뻑뻑하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하시는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저 나는 할머니가 나를 생각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맛있는 크림 수프 냄새에 신이 났다.

꾸덕하게 덩어리진 크림 수프를 각자의 국그릇에 떠 주시곤 ‘이렇게 끓이는 게 맞니?’ 하며 재차 물어보셨다. 푸딩을 떠먹듯 꾸덕한 크림 수프였지만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나는 그때 먹은 크림 수프가 제일 맛있었다. 맛도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느끼한 맛이 생소하실 텐데도 열심히 맛보시며 ‘네가 이걸 먹고 싶었구나. 참 맛있구나. 다음에도 또 먹자’라고 말씀해 주신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함께 해주시려고 노력해주신 것이 정말 감사했다.

나는 살이 많이 찌기도 했고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는 다른 음식들도 너무 맛있어서 그때 이후로는 크림 수프 잘 먹지 못했지만, 아직도 크림 수프만 보면 그때 먹었던 수프의 맛과 할머니의 사랑이 생각난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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