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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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재치 만점… 직설적이고 적극적 성격

마펫의 권유, 평양신학교 입학·제1회 졸업

1960년대 초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세미나에서 불교 정신문화원 원장 스님이 “기독교는 왜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선교합니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와 유교 같은 대 종교 틈에서 선교하려니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선교할 때 선교사들이 서양문화로 역동적인 태도를 갖추지 않으면 선교할 수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특징은 역동성이라고 말한 박명수 교수는 옳았다. 이기풍은 1865년 12월 23일 평양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증조부(曾祖父)는 홍경래 난에서 세도정치에 대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평양성을 떠나 황해도 구월산에 피난해 있다가 할아버지가 평양으로 돌아와 동문 밖에서 농사했다. 그는 전형적인 평양사람으로 돌팔매를 잘했고, 수영도 잘했다. 당시 평양 불량배는 전국에서 유명했다. 그는 어려서 재치가 있어서 여섯 살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외우고 12살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혔다. 그는 조부를 닮아 직설적이고 괄괄하고 적극적이므로 비위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고 사고를 냈다. 

당시 평양에서는 평양 감사 민병석(平壤 監司 閔丙奭)이 유교 복고 운동(儒敎 復古 運動)과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 運動)으로 서양인을 배척했다. 그는 정의감으로 양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와 서양 귀신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싫어했다. 26살 때 장터에서 전도하는 선교사 마펫을 보았다. 키가 크고 몸집이 커다란 사람이 서툰 조선말로 전도하는 모양이 거슬렸다. 이기풍이 돌을 던져 턱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다. 이기풍은 피했다. 그는 단지 불량배가 아니라 서양 사상에 대항하는 의협심이 있었다. 이기풍은 건축하는 장대현 교회에 가서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을 송두리째 파헤쳤다. 당시 조선은 중화사상이었는데 일본이 승리했다. 이기풍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기풍은 원산으로 피난했다. 원산에서 스왈른(William Swallen) 선교사가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았을 때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진 것을 떠올리며 “왜 내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돌을 던졌던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밤에 꿈을 꾸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날 아침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가 진정 회개하고 1896년 31살에 세례받고 전도 보조원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부흥 운동은 회개로 시작됐다. 그것이 곧 성령 운동이었다.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죄고백과 신앙체험을 했다. 다른 종교에는 죄고백과 용서에 대한 체험은 물론 그 이후에 찾아오는 기쁨과 평화도 없다. 선교사 무어(J. Z. Moore)는 “이런 회개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신앙체험을 하자” 선교사들이 놀랐다고 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선교사 그래함(W. G. Gram), 각성 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한국교회의 성격을 갖추게 하셨다.” 

이기풍이 평양에 돌아와서 마펫을 찾아가 진심으로 회개했다. 그는 회개의 의미를 알았다. 회개한 사람은 전도한다. 이것이 예수의 첫 선언이었다. 마펫과 함께 함경도 전도에 나섰다. 1903년 이기풍은 마펫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그 열정으로 5년 동안 성경을 배우고 1907년 여섯 명의 학우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신학교 제1회로 졸업했다. 졸업생 7명 중에 나이로는 세 번째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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