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춘원의 첫사랑, 화가 나혜석 [2]

Google+ LinkedIn Katalk +

‘은반’은 당시 장안의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고급 카페식 레스토랑이다. 감미로운 연주곡 ‘라노비아’가 목놓아 흐느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행복한 대화를 다정스럽게 나누고 있었다. 이때 저쪽 출입문에서 나혜석이 빗물을 털어내며 우산을 접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이 히틀러!” 제일 안쪽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춘원을 보고 나혜석은 마치 오랜친구를 대하듯 뜬금없는 ‘하이 히틀러’로 주먹 인사를 해 왔다. “하이 히틀러!” 춘원도 맞은편 의자에 목례를 하며 얌전히 앉는다.

“불러줘서 고마워요. 요즘 웬만하면 귀찮아서… 밤에는 좀처럼 안 나가는데, 춘원이 부르는데야 어찌 배길 수 있나. 호호호.” 나혜석은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는 친구처럼 친근감으로 혀도 짧게 반말이다.

춘원이 나이를 먹어도 두 살은 더 먹었는데 여자는 터놓고 지내려는 말투다. 속내의가 약간 비치는 하얀 블라우스 목련으로 받쳐입고 겉에는 까만 투피스에, 목에는 연둣빛 스카프를 길게 두른 나혜석의 패션은 은은히 흐르는 음악과 조명에 너무나 잘 어울려, 천상에서 이제 막 내려온 아름다운 천사같이 보였다.

역시 미술학도의 패션 감각은 천재급이었다. 춘원은 눈이 부셔 도저히 쳐다볼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는 흉내를 어설픈 장난기를 보이고 있었다. 춘원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정말 놀랍다. “왜 그래요? 갑자기.”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셔서 그냥은 볼 수 없네요.” “이제 그만 놀리세요.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내가 미인이라는 걸 이제 겨우 알았냐?” 여인도 즐거운 듯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춘원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면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여인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참 예쁘다. 섹시하고 귀엽다. 자신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 흔들어 놓는 마의 힘을 가진 신비스런 여인! 나혜석은 몸가짐을 고쳐 앉으면서 춘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짐짓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소?”

춘원은 갑자기 여인의 단도직입의 질문에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아 힘있게 말했다. “실은 그림에 대한 문의사항은 아니고, 더 미룰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 있어 보자고 했소.” 여인은 긴박한 상황이라니까 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른 말투로 물었다.

“긴급한 상황이란 도대체 뭐요? 어서 말해 보시오.” “그럼 말하겠소. 어제 내청각 개인전에서 혜석씨를 다시 보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넘어질 뻔 했소!” 나혜석이 놀라는 듯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뭣 때문이요?” “너무 아름다워서요!” “뭐라구요?!” 나혜석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요?” 나혜석은 진짜 화를 내고 있었다.

“춘원이 점잖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형편없는 장난으로 나를!” 그러면서 여인은 들고 왔던 핸드백과 우산을 챙겨서 그냥 갈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좀, 제발 진정하세요. 놀리는 말 아니오. 진심이오. 내 일찍이 이런 일 없었소. 난, 어제 혜석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단 말이오. 솔직히 말하는데 왜 내 말을 장난으로 보시오?”

춘원의 진지한 설명을 듣고 나혜석은 자리에 엉거주춤 다시 앉았다. “화를 낸 거 미안해요. 난 춘원이 나를 갖구 노는 줄 알았어. 미안!” 여인은 금방 얼굴 만면에 웃음을 짓고 다시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여인은 춘원의 의사도 묻지 않고 러시아 산 고급 ‘보드카’와 몇가지 안주를 시키고 있었다. “영숙이도 잘 있소? 우리 서로 만나는 걸 알면 나 죽으니까 잘 알아서 하시오.”

나혜석과 허영숙은 친구지간이다. 성질이 거칠고 완력이 좋은 허영숙에게 나혜석은 언제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언젠가 싸움에서 나혜석이 참패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혜석은 벌써 허영숙을 크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지금 나혜석은 첫사랑 최승우를 잃고 의지할데 없고, 몹시 외로운 상태에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사실이다.

나혜석도 평소에 춘원의 그 명성과 온화하다는 성품과 잘생긴 동안에 늘 호감을 갖고 있던 차제에 자기에게 반했다고 하니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럼 한가지만 확인해요. 장차 계속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지금 나를 진정 사랑하고 있단 말 하늘에 맹세해요?”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