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창 장로가 만난 사람들]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조창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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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지도자들에게 비전 제시할 수 있는 기독교여야”

건강한 지방자치 교육하는 재단 만들고 싶어…후대에서 이뤄주길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조창현 장로(사진)를 그가 출석하는 현대교회(김명윤 목사 시무)에서 만났다. 조 장로는 1958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The American University)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1964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 취득 후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티칭 펠로우, 1968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펨브록 캠퍼스(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Pembroke) 정치학 부교수 및 교수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와 한양대학교 행정학 교수로 봉직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 영국, 독일 등의 지방자치 연구로 6개의 논문을 발표했고, 우리나라 지방자치제 도입과 발전을 위해 정부 자문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정부혁신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고 이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장관급인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과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방송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일했다.
조 장로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펨브록 캠퍼스에서 올해의 교수상을, 한양대학교에서 백남학술상과 최우수 교수상을 받았고, 정부에서 국민훈장 동백장과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조창현 장로는 과거 정부 혁신의 기틀을 다졌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사회 개혁과 혁신을 끌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것이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IMF로 정부혁신 주도, 중앙인사위원장과 방송위원장까지

“1998년 IMF가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업체 부도는 정부가 금융관리를 너무 느슨하게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기업에만 구조조정하지 말고 정부도 구조조정을 하라는 것이었죠.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고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정부조직개편 심의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를 포함한 행정학자 세 사람과 국회의원, 변호사, 언론인 등이 모여 밤을 새워 두 달 만에 정부조직개편안을 만들었고 개혁을 시작했죠.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조직개편이라는 간판은 이제 달았고 내부를 완전히 새롭게 조직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저는 한양대학교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일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때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정부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한양대학교 부총장으로 일하며 일주일에 두 번만 사무실을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혁신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부조직개편 심의위원회가 다하지 못했던 구체적인 일들을 진행했습니다. 정부 산하단체 공공기관까지 전부 조직개편을 했죠. 2년 반 동안 한양대학교 부총장 일을 하면서 일주일에 이틀은 당시 여의도 성모병원 건너편에 있던 조달청 사무실에 가서 그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김 대통령이 부르시더니 ‘당신이 들어와서 구체적으로 인사 개편을 해야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김대중 정부에서 만든 인사위원회의 초대위원장 임기가 끝나고 그 뒤를 이어 제가 위원장으로 2002년 발령받았어요.”
김영삼 정부까지도 우리나라는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 관료제도를 이어오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치적으로는 해방됐지만 행정적으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총독부 때와 똑같은 제도 아래 똑같은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계속 나랏일을 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국민 생활 수준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관료가 제대로 움직여줘야 해요. 나라 살림을 군림하듯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와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조선 총독부 관료제에서 탈바꿈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경제가 급성장하니까 부실한 정부가 너무 많았어요. 예산 낭비가 심했지요. 지금도 그렇고요. 예산 중 집행하는 것은 50-60%밖에 되지 않아요. 타이틀만 있고 예산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없는 겁니다. 중앙인사위원회에서 1년간 그런 것들을 만들다 보니 김대중 대통령 임기가 끝났어요. 제가 정부에 들어갈 때 이미 65세가 넘었고 한양대학교 부총장에서 은퇴한 다음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은퇴하고 외국에 나갈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일을 더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가보니 직원이 43명이었어요. 43명을 데리고 어떻게 장관급 인사를 하겠습니까. 관료들이 자기 권한을 얼마나 안 내놓으려 하는지, 당시 행자부에서 인력을 주지 않는 거예요. 중앙인사위원회는 채용부터 은퇴까지 다 맡아 관리해야 하는 곳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우리에게 보고를 받으러 오신 자리에서 말씀드렸고 그 결과 정부인사행정의 대부분을 인계받고 보니 직원이 430명으로 늘었습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예산도 크게 늘었고요. 그만큼 일감을 준 거지요. 들어가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전부터 늘 생각해왔던 것이 뭐냐면 민주주의가 독재국가와 다른 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인데, 즉 모든 일이 국민의 편에서 국민이 원하는 방식으로 돼야 하는 것인데 실제론 관료들 편의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걸 고쳐야된다는 생각. 그래서 그때 고등고시 시험 과목부터 은퇴제도까지, 약 8년 동안 있으면서 대대적으로 손을 봤습니다.”
조창현 장로는 중앙인사위원회에서 고위공무원단 제도를 도입했다. 국가 공무원 가운데 일부 고위직을 구별해 관리하는 제도로, 관료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행정 서비스의 질을 높여 국민의 신뢰감을 키우기 위해 만든 것이다. 또 업무협약제도도 도입했다. 상급자나 상급기관의 지시만으로 업무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기관장과 그 직원대표 간에 계약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평가하는 제도다.

전문가가 보지 못하는 것 봐주는 역할이 더 중요할 수도

“재임명까지 돼 7년 동안 일을 하다 보니 제 나이도 70에 가깝고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좋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사표를 냈어요. 대통령께서 임기가 남았는데 왜 그만두냐고 해서 ‘평생 공부만 해서 피곤합니다. 이제 좀 놀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왔어요. 그리곤 미국에 가서 한 달 가량 쉬고 돌아오니까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요. 비서실장이 나를 만나서 동의를 꼭 얻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제가 조건을 내걸었어요. 첫째, 내가 기독교인인데 그동안 공무가 바빠 새벽기도도 못 가고 주일예배도 많이 빠졌다. 내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해 보고 하나님 뜻이면 하겠다. 둘째, 아내의 동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집사람이 공무원 부인이라고 제 승용차를 한번 타본 적이 없어요. 내게 좀 쉬면서 여행이나 하자는 말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대통령께서 부르시면 백의종군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해요. 이튿날 새벽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이게 제가 할 일입니까, 욕심입니까. 기도 끝에 해야 되겠다는 확신이 서서 갔더니 방송통신위원장을 맡으라는 겁니다. 난 행정학만 공부한 사람이고 방송을 모른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방송위원회에 방송전문가는 많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방송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 임기 끝까지 같이 했습니다.”
어디나 전문가는 많다. 전문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주는 역할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한 시대의 변화에는 누가 등장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 자리에 조창현 장로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20세기가 저물어가던 시기에 전 국민이 IMF라는 고난을 겪었다.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자녀들의 돌반지까지 끌어모아 나라를 살리는 데 힘을 보탰다. IMF라는 폭풍이 몰아쳤기에 정부 개혁도 가능했다. 정치의 민주화가 시작됐고 경제가 안정화됐다. 시련이 복이다.

아버지의 신행일치 모습 보고 자라

조창현 장로가 정부에서 일할 때 많은 유혹이 있었다. 찾아와 청탁을 하거나 봉투를 건네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마다 조 장로는 상대가 무안할까 직접 말로 하지는 못하고 ‘지금 여기 녹화가 되고 있다’라는 식으로 유혹을 물리쳤다. 조 장로는 아버지께 배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잘 만났어요. 신앙이 참 좋으셨고 강직한 분이셨어요. 아버지께서 그 옛날 농협에서 일하셔서 삼사년마다 전근을 다니시느라 나는 초등학교를 네 군데 다녔어요. 태어나기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는 광주에서 했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고 미국에서 살았으니, 어떤 의미로 고향도 없고 동창도 없어요. 아버지께서는 매일 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시고 성경말씀을 항상 읽으셨는데, 당시(1950년대) 농협중앙회 이사까지 하셔서 그런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뇌물이 많이 들어오겠습니까.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올 때 빈손으로 안 오고 케이크를 사갖고 왔어요. 어린 난 케이크가 좋아 뜯어보면 그 안에 돈이 들어있는 겁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아버지께서는 제과점에서 똑같은 케이크를 사오라고 하시면서 그 돈을 그 밑에 넣어 보낸 이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하셨어요. 또 관용차는 출퇴근이나 공적인 일에만 타고 다니셨고 주일에 교회에 가실 때도 이용하질 않으셨어요. 우리 어머니도 못 타셨지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혹을 받고 시험에 빠질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려요. 훌륭한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아버지를 내가 실망시키면 되겠는가 하고요. 아버지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되고 편안한 삶을 살아왔지요. 한 번도 출세를 해서 권력을 누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이나 착취당하고 무시 받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해서 행정학을 계속 공부하게 된 것이죠.”

출세 아닌 봉사하는 관료 필요해

건강한 지방자치 위해 교회가 나서야

조창현 장로는 한국교회가 할 일이 많다고 했다. 130년 전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했던 기반이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것이라며, 이제 조금 넉넉하고 풍요로워졌으니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교만은 언제 또 국가 위기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 기독교가 이만큼 발전해서 교회도 많아지고 해외에 선교사도 많이 보내지만 동시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교인 수가 줄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가 하루아침에 위태롭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길게 봤을 때 좋은 징조는 아니거든요. 가난에서 벗어나 문명국가를 이룩할 수 있도록 이끈 이 좋은 기독교가 더 이상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종교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연구해야 합니다. 나 혼자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가 젊은이와 우리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8, 19세기 영국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를 졸업한 사람들의 가장 큰 목적은 해외선교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 등 오지에 가서 많이 죽었어요. 그런 정신과 비전을 젊은이들에게 제시하는 기독 지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지방자치를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도를 도입을 가져온 장본인으로서 조창현 장로는 지방자치가 가장 잘 이뤄지고 있는 나라로 독일을 꼽았다.
“여야 국회내무위원회 위원들과 시찰단을 만들어 독일에 가서 지방자치 현장을 견학했었는데, 그때 ‘아, 이것이 바로 지방자치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변호사 출신의 한 시장을 만났는데 대화가 잘 통해 여러 번 식사를 같이 하면서 제가 물어봤어요. ‘당신 이렇게 훌륭하게 시장직을 맡아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데 국회의원도 하고 주의원도 하고 나중에 독일 수상으로 나가야 될 거 아니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생각이었어요. 그가 답하길 ‘난 이곳에서 이만큼 성공했고 여기에서 죽을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이 더 행복하고 안전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인지가 내가 시장으로서 갖는 유일한 목적이다’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 사회이지 관료사회가 아닙니다. 출세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사람이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고 대통령도 돼야 하는 거지요.”
조창현 장로는 재단을 만들고 싶었다. 지방자치와 기독교의 연관성을 연구하고 이론과 사례를 만들어 좋은 지방자치 문화를 교육하기 위해서다. 조 장로가 만들지 못한 재단이 뜻있는 기독인이나 교회의 후원으로 세워지기를 조 장로는 기대한다.
“우리나라 전국에 16개 서울과 같은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있고, 시장 군수 구청장만도 250명 정도, 지방 의원들까지 합하면 수천 명에 이르는 데 이들을 일일이 다 교육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런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재단을 만들어서 장기적으로 기독교 지방자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겁니다. 지방의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당선 방법도 가르치는 겁니다. 돈 쓰고 밥 먹는 그런 선거가 아니라 마을의 실질적 필요를 들여다보고 개선방안을 고안해내 주민들의 동의와 감동을 끌어내는 건강한 선거방법 말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래선 안되겠다, 교양을 기르자, 개혁하자, 그런 마음들이 젊은이들에게서 나와야 해요. 또 현재 우리나라가 대도시에만 인구가 쏠려 있어요. 누군가는 지방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게 굉장히 큰 문제예요.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 고향에서 나도 잘 살고 우리 자식도 잘 살 수 있을까, 이곳에서 농사짓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떡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해요. 나라에서는 그런 비전을 제시해줘야 하고요. 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민해야 합니다. 문화는 기독교인들이 바꿔야 해요.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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