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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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로회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1916)는 최초의 선교사였다. 의료선교사 알렌이 그 직전 해 9월에 한국에 왔으나, 그의 선교 파송지는 처음부터 한국이 아니었고, 미국 공사 직원을 위해 의사 일을 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이름을 남긴 토마스 목사 역시 중국 상해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언더우드와 같이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신혼부부 선교사 역시 한국에 들어 온 배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니, 최초의 영예는 언더우드에게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언더우드 3세의 말처럼 이를 시시콜콜 따지는 일은 부질없이 보인다. 그러나 최초가 얼마나 중요한가. 언더우드는 첫 선교사의 역할을 든든하게 해내었다. 언더우드가 이십오 년 동안 한국에서 이뤄 낸 선교사역들은 그야말로 ‘한국에 천국을 건설해 간 것’이었다.

그 최초의 직함 중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의 영예가 있다. 이 장로회 총회 조직을 한국교회사의 대가 민경배 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회합이 이 기독교회의 총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중대시한다. 교회는 움직이는 기구요 포괄적인 조직일 때 참 교회인 것이다.” “우리 교회는 ‘아시아 전체에서 보았을 때 국회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장 민주적인 시민 생활의 지도력’이 배출되는 유일한 기관”이 되었다. 그 초대 총회장이 언더우드였다.

2. 장로회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를 증거하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자성경학원에서 “목사, 장로, 선교사들을 합쳐서” 총 221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12년 9월 1일이면 경술국치의 한일합방이 있고 나서 겨우 2년이 지나던 때였다. 나라는 없어졌으나 교회는 방방곡곡에 든든하게 뿌리 내려 독립과 새로운 한국 건설이라는 희망의 진원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회합이 나라도 없어진 이때 이뤄졌으니 그 장엄한 모습, 십자가 군병들의 그 성결하고 장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취임 설교(「모든 것을 해로 여김」(빌 3:8-9))를 하는 장로회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의 눈은 이 세상에 둘이 없는 완전한 소망이신 임마누엘 예수를 응시했다.

“예수님은 죄를 덮어주시는 구주시요 죄를 이기시는 구주시요 이 세상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구주로 오늘날 우리와 같이 계신 구주시다. 그런고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앞에 표준만 되실 뿐 아니라 교회 위에 권세 능력이시며 교회 안에 계신 생명이시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하실 뿐 아니라 부활하사 승천하시었고 승천하시는 일이 마지막이 아니고 세상의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 신자 가운데 같이 계신 구주시니 곧 우리의 생명이시오 우리의 소망이시다. 그런즉 이 소망은 이 세상에 둘이 없는 완전한 소망이다. …이 구주의 존재를 우리 신자들이 그 행위로 이 악한 세상에서 나타내야 할지니…”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 교수·현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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