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이원설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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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장은 이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 큰 공로자였으나 임기 중 끊임없는 역풍을 맞고 있었다. 1986년 제1대 총장이 된 이듬해 7월 지방신문을 통해 ‘한남대학교발전 범도민협력위원회’라는 명의로 이 총장의 비위를 적은 퇴임 요구 유인물 사건이 터졌다. 진상 규명 위원회를 통해 허위임이 밝혀지고 신문사의 사과 기사와 기자의 처벌로 끝났지만, 적지 않은 상처였다. 1990년 제2대 총장으로 유임된 후로도 계속 문제는 발생하고 학생의 부정 입학과 대학단지 조성에서의 재단 비리, 총장의 입시 전형료 전용 등으로 총장 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1년은 최악의 해였다. 학기 초부터 노조는 대학교회에서 농성하며 직원 1명을 처장으로 보임하라고 요구했다. 4월 26일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다 숨진 명지대 강경대 사건이 일어나자 한남 대학 학생들도 ‘학원 자주 완전 쟁취, 민족 한남 결의대회’를 열고 총장에게 비리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 열기는 끊이지 않고 10월에는 학생 50여 명이 총장실에 들어가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부정 입학이 아니고 뒷돈 거래도 없었다. 다만 (약간) 원칙을 벗어난 입학이었음은 인정한다”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나는 학교를 떠나겠다”라고 총장은 말했다고 총학은 밝혔다. 교무위원회에서는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남 가족에게 드리는 글’을 전체 교수들께 보내기도 했다. 

이내 총장은 최근의 학내 사태에 대해 자신이 총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선언하고 교수들의 의견을 물었다. 교협은 이에 따라 총회를 소집했으나 반대가 없어 총장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이사회도 총장의 뜻에 따라 1991년 말로 사임할 것을, 결정했다. 나는 문제의 총장 비리에 대해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정 입학 건은 아마 그가 조직한 ‘한남대학교 후원회’ 회원의 자녀를 정원 외 입학시킨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대를 위해 이 후원회는 그에게 연고가 없던 대전의 버팀목이었기 때문에 대학 구성원 암묵의 이해를 바라고 그런 호의를 베풀었던 것 같다. 아마 입시 전형료 전용도 그는 학교 발전을 위해 썼을 것이다. 그러나 공금을 그 용도를 벗어난 방법으로 썼다는 건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독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 미래의 자기 이력서를 쓰라고 권고했던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자기의 일생은 거의 그 미래 이력서대로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일도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교수협의회 정관에 따라 교수들이 나를 대학원장으로 뽑아 줘서 1991년 그가 제2대 총장으로 유임된 다음 해부터 2년 가까이 그와 함께 교무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가이 국제 연구소의 설립자인 John Edmund Haggai의 명예박사학위를 총장의 요청으로 내가 제청하고 드린 바 있다. 

나는 대학원장이 되기 전 이 총장의 호의로 하와이주에 있는 마우이의 하가이 훈련원에서 행한 3일간의 집중 훈련에 참여한 일도 있다. 총장이 특별히 주선해서 나만 단독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었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자와 운동 코치들의 맞춤형 전문학습으로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발견하고 신앙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상습적인 전도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와 숙소 앞에 있는 풀장에도 갔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 행정에 대한 어려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나는 전임 오 학장의 사람이었고 그는 나를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서로 합력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와의 마지막 2년을 물과 기름으로 지낸 것이 안타까웠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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