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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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35)

상주에서 안동까지(10)

순례는 필자에게도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어느 해 1월 순례를 할 때에 영하 20도 가량 되었던 강추위가 몰려온 상황에서 혼자 순례를 감행한 적이 있다. 한겨울에 행하는 순례는 어떻든 목적지까지 가야 할 강한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목적지까지 가야 여관을 찾아 몸도 녹이고 저녁도 먹을 수 있고 쉴 수가 있다. 산골에서 겨울 태양은 서산으로 빨리 넘어간다. 해가 제 갈 곳을 간지 오래 되었지만, 순례길을 아직 반도 걷지 못했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났다. 순례를 나서보면 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고, 길은 언제나 너무나 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의 연속이다. 바쁘게 길을 걷다 보면 길을 잘못 선택해 들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하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다. 1월 한겨울 밤은 길가는 나그네에게도 길은 동정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길이 만약 인격체라면 추운 한겨울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산골짜기 협곡의 어두운 밤길을 걷는 낯선 나그네를 불쌍하게 여겨 빠른 길을 안내라도 해 줄만도 하겠지만, 길은 늘 말이 없다. 겹겹이 껴입은 옷 속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한기는 순례자에게 저체온증으로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추위와 함께 어둠이 주는 공포에 더한 저체온증에 대한 공포까지 몰려왔다. 그 공포와 저체온증을 떨치기 위해 되돌아서 왔던 길을 100m 달리기 하듯이 약 3km를 달려가니, 지나오면서도 너무 추워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샛길이 나타났다. 그 샛길을 따라 달려가니 싸늘하게 식어가던 몸에 온가가 돌아왔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목적지로 가서 밤 1시나 되어 그 지역에 있는 여관을 찾으니 없다. 24시 편의점으로 가서 파출소를 물어보고 파출소 근무자에게 여관을 물어보니 그곳에는 여관이 없단다. 그날 밤 경찰의 도움으로 그 인근에 있는 여관으로 가서 새벽 3시나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경험을 했기에 필자는 순례길에 나온 누구든지 자신의 몸과 건강 상태에 따라 순례의 노정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가지도록 맡긴다. 그것은 자신의 몸 상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아무리 순례를 휼륭하게 잘 한다 해도 안전사고를 겪는 일이 일어나면, 그 순례는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례는 삶의 현장에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는 늘 어느 곳이든 안전사고에 대한 염려가 있다. 그런데, 순례현장에 나오면 자유롭게 선택을 하게 한다고 해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많다. 가령 산길을 걸어서 순례를 10km했는데, 그 산길에서 어떤 순례 참가자가 힘들어 더 이상은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앞으로 가면 20km를 더 가야 마을이 나오고, 뒤로 되돌아 간다면 10km만 가면 마을이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그 참가자가 더 못 걷겠다고 한 것은 개인적인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니 그 혼자 뒤로 가든 앞으로 가든 선택하게 하고, 나머지 순례 참가자들은 순례를 위해 함께 앞으로 가도록 해야 할 것인지, 

2. 아니면 다 같이 뒤로 돌아 가야 할 것인지, 

3. 그것도 아니면 순례단 본진은 앞으로 나가도록 하고, 순례 지도자 중의 한 명과 되돌아 가고자 하는 참가자를 마을까지 안내하게 하고 그 다음 목적지로 택시를 타고 와서 본진에 합류하게 할지 결정해야 한다.

순례 행사를 하다보면 이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런데, 순례행사를 하다보면 날씨의 변화와 그것에 따른 많은 환경의 변수가 있다.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른 여러 가지 변수도 있다. 필자가 산티아고 길을 순례할 때 만난 어떤 분은 산티아고 순례를 참가하면서 유서를 쓰고 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평생에 꼭 한번은 순례하고 싶었지만, 순례길에 무슨 일을 만날지 아무도 예측을 못하기에, 만약을 위해 그렇게 유서를 쓰고 왔노라고 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해가 하늘에 있는 동안은 대부분의 순례 참가자들이 많은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한없이 한가롭고, 여유롭게 행동한다. 그래서 여유롭게 여가를 즐기고 싶어하고, 전도도 해야되고, 환경보호도 해야 되고, 기독교문화 탐방도 하고 싶어하고, 순례도 하고 싶어한다. 순례는 복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이 추구하는 순례를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순례 참가자의 선택 폭이 좁아진다. 우리가 모든 것에 다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순례에도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기에 순례의 목표를 정하고, 한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순례를 안내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누구나 걷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잘한다, 그래서 순례를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전문가가 된 상태에서 순례를 개성있게 하고 싶어 한다. 특히 지도자들과 순례를 함께 하는 경우에는 각자의 선이 분명히 드러난다. 각자가 지도자이므로 자신의 주관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순례는 종종 퍽 어려운 순례가 되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다 자신의 주관이 있고, 개성이 있고, 각자는 순례에 나오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함께 온 사람들을 의식하고 자신의 주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경우 개별로 또는 단체별로 자유스럽게 순례를 하도록 하면 된다. 어디에 목표지점을 정해두고 그 지점까지 언제 도착해야 하고, 언제 그 지점에서 출발하게 되는지를 말하고 그 지침대로 하면 된다. 만약 어떤 위기 상황이나, 특이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최종 목표지점으로 가서 해결하도록 지침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에 그 최종 목표지점에서 먼저 도착해 처리하도록 하고 그곳에 순례단이 집결하도록 하고 그곳에서 순례단의 해단식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순례 참가자들 모두가 그 순례길로 처음 나온 경우에는 다 함께 움직이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에게 처음 걷는 길은 어렵다. 낯선 지역에서 낯선 길을 찾아가면서 길을 걷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 낯선 길이 때로는 산길, 때로는 들길, 때로는 도시길이 반복될 때도 있고, 산을 넘기도 하고 물을 건너가야 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보폭이 다 다르고, 건강 상태도 다르고, 걷는 일을 쉽게 하는 사람도 있고, 힘들게 걷는 이도 있다. 걷는 것에 대한 마음 상태도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순례길의 전체 노정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순례를 얼마 동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례에 참여했다는 사실 그 자체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오는 이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단체로 순례를 하는 무리도 있지만, 대개가 개별적으로 나온 순례자이다. 그 모든 개별 순례자들은 순례를 하면서 하루 동안 또는 단 몇 시간 동안 친구가 되어 함께 걷는다. 하지만, 순례길의 친구들이기에 만나서 함께 걷다가 또 헤어지고 만나고 또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일이 반복된다. 만나서 하루 이틀 보폭을 맞추어 같이 걷지만, 언제 다시 헤어질 수 있다. 헤어진 후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영영 다시 못 만나는 경우도 많다. 걷는 동안에는 깊은 사귐으로 함께 걷지만, 언제 또 헤어진다고 해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다시 만날 수 있기에. 그렇게 걷다가도 보폭이나, 어떤 다른 환경이 작용하면 아무 미련 없이 헤어져서 자기만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해도 산티아고 길은 혼자서도 충분히 순례를 할 수 있는 순례길의 기반 조성이 잘 되어 있다. 그래서 처음 순례를 나와도 스페인어를 전혀 못해도 눈치껏 순례를 하면 누구든지 순례를 다 잘 할 수 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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