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피울음으로 오늘 밤도 ‘렌’은 ‘시몬’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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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있을 때, 어느 날 문학청년 조지훈이 회현동 모윤숙 집을 예의 방문했다. 조지훈은 선머슴아처럼, 현관에 들어서면서 경상도 사투리에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동탁이 왔어얘.” 동탁은 조지훈의 본명이다. “어서 오라우! 오랜만이야. 우리 미남 청년! 그간 어떻게 지냈나?” 모윤숙은 반갑게 조지훈을 맞아 주었다. “샌님 덕분에 제가 이번에 등단 성공했어얘! 참으로 고맙네요.” 조지훈은 머리를 한참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실은 조지훈이 오늘 이곳에 갑자기 오게 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모윤숙 시인이 요 근래 밤잠을 설치며 열심히, 그러면서 심각하게 무언가 쓰고 있는 일기장이 있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한지라, 그것이 하도 궁금해 그것을 훔쳐 보러 온 것이다.

“우리 미남 청년 오랜만에 왔으니 맛있는 차를 대접해야지” 하면서 모윤숙이 부엌 취사방으로 건너가고 있음을 놓칠세라, 조지훈은 일기장이 있을만한 책상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이리 저리 막 뒤지는데 일기장은 서랍속 한쪽 구석에 그냥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조지훈은 취사방쪽을 힐끔 힐끔 살피면서 일기장을 얼른 자신이 들고 온 가방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지훈은 겨우 견디며 한참 딴청을 부리다가 얼른 도망갈 기회만 엿보았다.

“이제 맛있는 차도 얻어먹었겠다. 감사의 인사도 드렸겠다. 얘기도 많이 했으니, 그만 가볼래요. 샌님.” 들키기 전에 얼른 튀는 것이 장땡이다 싶어, 조지훈은 도망치듯 모윤숙의 집을 빠른 동작으로 나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동탁은 그 문제의 일기장을 얼른 꺼내 읽기 시작했다. 모윤숙의 ‘렌의 애가(哀歌)’ 첫 일기장 편지(1신)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 앉아 밤을 새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허공 중에서 마치 나는 당신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려는 둣이 조용히 꿇어 앉았습니다. 광명한 밤하늘 저편으로부터 어둠을 멸하려는 순교자의 자취와 같이 당신은 지금 내 적막한 주위를 응시하고 서신 듯도 합니다. 이 침묵의 압박을 무엇으로 깨치리까? 밤 바람이 주고 가는 멜로디가 잠깐 램프의 그늘을 흔들리게 합니다. 아직 나는 뜰 앞의 장미를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심어 주신 그 장미를! 여름 신의 애무가 있기 전에 장미는 나에게 향기를 전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이런 밤 장미가 용이하게 내 곁에 가까이 있다면 나는 그 숭고한 향기로 당신을 명상하기에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으려면 자연 마음이 흩어지려 합니다. 그것은 책 속에 배열해 놓은 이론보다 당신의 산 설교가 더 마음에 동경되는 까닭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난 동탁은 전신에 몰려오는 그리움의 아픔에 잠시 눈을 감았다. 온몸에 전율이 왔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잘 쓴 시를 여태 본 적이 없었다. 동탁 조지훈은 누구인가. 후일 박두진, 박목월 등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이 나라 조선 문단을 뒤흔들었던 시인 논객이 아니던가.

청년 동탁은 더 주저할 수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평소 잘 아는 안국동 ‘일월’ 출판사로 내달렸다. 훔쳐온 일기장을 주인 허락도 없이 지금 시집으로 출판하려는 것이다. 나중에 모윤숙 선생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좋은 내용을 세상에 하루라도 빨리 펼쳐 보이고 싶은 욕심으로 지금 동탁은 제정신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를 치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은 청년시절부터 배포가 이렇게 컸던 것인가. 윤숙 선생이 평소 자신을 몹시 아껴주는 처지에서 이 정도로, 설마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겠나 하는 믿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동탁은 훔친 모윤숙 시인의 몰래 써둔, 39쪽 짜리 ‘렌의 애가’ 시집을 출판해서 고고의 성(聲)을 내며 이 세상에 발표되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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