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경영] 고난의 행군 – 체제의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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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의 이야기다. 그 당시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전개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은 심각한 식량난 속에 사회적 이탈을 막고 김씨 왕조에 충성을 강요하는 슬로건이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진보정당의 대통령이 그때 당선되었다. 그는 친북성향으로 햇볕정책을 선호했다. 북한 땅엔 속된 말로 춥고 배고픈 나라다. 먹을 식량이 없는데 입을 옷도 없다. 그래 나는 여차여차한 연고로 인해 북한 동포들에게 ‘옷 보내기 운동본부장’이란 직책으로 그때 봉사했다. 

식량은 군용으로 전용될 수 있지만 헌 옷은 아니었다. 이북에는 비날론이라는 섬유가 있다. 비니루와 나일론을 혼합한 직물이다. 입을 수 없는 저질섬유로 주체 섬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했던 그 공장마저 전기사정으로 공장문을 닫고 있었다. 대한민국에는 식량도 옷도 넘쳐났다. 누구든 옷장을 열면 입지 않는 옷이 몇 벌씩은 다 있다. 유행이 지났거나 사이즈가 안맞는 것들이다. 이 헌 옷을 처리하려면 공해가 발생한다. 막대한 비용도 든다. 그래 헌 옷을 모아서 이북에 보내기로 했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단이 다 참여했고 거국적으로 모았다.

처음에 헌 옷을 보내준다고 하니 얼어 죽으면 죽었지 그런 거 안받는다고 자존심을 부렸다. 그런데 한 컨테이너를 시험적으로 보냈더니 그걸 받아보고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 옷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120만 벌을 모아 보냈다. 40톤 컨테이너로 37개를 보냈다. 그리고 간장도 보내달라고 해 1컨테이너를 보냈다. 저들이 입어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옷감에 색조 있는 옷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검은색, 회색, 국방색 일색의 어두운 사회다. 그 어두운 세상에 의상 색깔의 변화가 왔다.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보낸 물건 중에 블루진 바지가 엉덩이나 무릎이 찢어진 것들이 섞여있었다. 반바지나 진바지 끝이 너덜너덜한 것도 있었다. 우릴(북한) 무엇으로 알고 이런 것을 보냈느냐고 격노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지냐고 거세게 항의하는 것이다. 남한 젊은이들 문화를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믿지를 않는다. 막무가내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힘들게 힘들게 설득해서 겨우 수습했지만, 심한 문화차이를 절감했다. 인구 10분의 일인 거의 300만 명이 굶어 죽고있는 상황이다. 

먼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그때 너는 무얼 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있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우리집 5식구가 평생 먹는 식량을 계산해봤다. 대량 250m/t 분량이었다. 그래 옥수수 250m/t 대금을 부담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식량 지원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5개 시중은행 노조위원장들을 대동하고 풀무원 창립자 원경선 선생 외 몇 명이 같이 동행했다. 노조위원장들과 며칠간 여정을 같이 하면서 노조 간부들의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복음의 동토 지구상 최대 연옥 속에 갇힌 북한 사람들은 그들은 서서히 망해왔다. 그래 그들이 얼마나 낙후되었고 비참한 상황인지 상대적 빈곤감을 잘 모른다.

북한은 공산주의에 함몰된 독재 세습 왕조다. 나라의 운명은 어떤 지도자를 세우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갈린다. 북한의 문제는 바로 체제의 문제다. 나는 1990년대 북한에 갔을때 “나에게 북한 농업성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1년 이내에 북한 식량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이 그렇고 그렇게 할 수 있다.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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