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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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어머니와 며느릿감 ④

행동하는 것마다 클라라 먼저 생각

연애라 부르기 싫은 아름다운 ‘사랑’

클라라에게 어머니 품같은 위안받아

에너지 원천… ‘사랑의 원형질 예수’ 

그는 나보다 더 무엇이든지 아는 것 같다. “한 집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하던 말을 생각하고 혼자서 웃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 마지막하며 결심하던 일을 깨트리고 찾아가면 그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로만 그렇지 안 올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설교도 교육도 식사도 취침도 모두 클라라를 중심해서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가히 미쳤다고 하리라고 긍정했다.

사면초가라더니 나를 둘러선 모든 시선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고 경멸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 번 뛰어든 이 수렁탕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전부 이 일과 부합시켜 좋게 해석하려고만 드는 것 같다.

그러는 내가 우습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이란 돌부처와 같아야 하겠는가. 그렇기 위해서 클라라와 끊어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자기들의 입장이 아니니까 쉽사리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면 좀더 보아라는 듯이 내세우고도 싶었다.

마치 죄인이나 잡은 듯이 나를 불러 충고하는 것을 들었다. 약한 마음이니 아프기도 했다. 거기다가 옛적 고망년의 친구가 찾아와서 새삼스러이 내 약혼 문제에 대해서 권유하는 것을 들을 때 슬그머니 짜증도 날 지경이다. 거기다가 모모한 친구의 행동은 아니꼬와서 못 볼 지경이었다.

이런 생각이 착잡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에 나는 그것을 천연스럽게 간직하질 못하니까 클라라가 두 번이나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은 했지만 괴로움이란 혼자서만 간직한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무엇이 있으면 곧 클라라와 의논하고 싶고 또 알리고 싶은 것이 철없는 내 마음일 것이다.

1주일의 일기만이라도 적어서 두고 싶었으나 이 한 책에 적어도 모자랄 것만 같은 많은 생각이 이 한 주일 동안에 내 가슴을 씻었다. 그리고 또 많은 사건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는다.

어린이에게 바쳤던 정조를 내가 파괴한 것은 아니다. 10년, 적은 햇수지만 베개 없이 살아온 10년을 그렇게 무시하고 클라라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악착스런 일이다. 더구나 클라라가 행복만을 원해서, 안일만을 위해서 나를 사랑했다면 모르되, 우리의 사랑은 연애라고 부르기 싫은 사랑이다.

그는 나를 도와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보통여성과 다르다는 점도 말해 주었다. 더구나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를 지향하는 마음은 아름다웠다.

물론 내가 좀더 이런 데 그의 만족을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만은 유감이지만, 다 허공에 뜬 공상과 영웅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여성들 중에서 어머니를 찾은 것 같은 감이 들었다. 장발장에게 있어서의 코제트는 애인이요 딸이요 어머니인 것 같이 그도 나의 어머니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일주일에 생긴 일을 마음에 써 둔다.

내게는 어머니가 살아 있을 줄만 알았더니 벌써 안 계시고… 그러니까 우리의 행복된 모습을 즐겨줄 아무도 세상엔 없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외로워질 때에야 클라라는 얼마나 외로운 때가 있을까 생각되는 때가 많다. 그러나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볼 때 속으로 서러워하는 것이 더 쓰라릴 것만 같았다.

내 갈 길이 막연해지는 것 같다. 주의도 주장도 모두 버리고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생각한 때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위안을 받지 못하고는 이 처참한 길을 걸어갈 수 없는 약한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클라라를 소유해야 한다.

나는 클라라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이다.

1952년 여름은 ‘큰형님’ 황광은의 생애 중 가장 바쁜 기간에 속한다. 그는 소년시 건설계획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난지도에 세워진 소년시는 광은 형의 전력 투구에 의한 예지와 신앙과 노력의 결정이기도 하다.

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난지도 삼동 소년시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의 저자이자 극작가 이반 교수는 이 책에서 “‘1950년대에 어떻게 이런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었으며, 그것을 현실에 옮기게까지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상주의자 황광은의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묻곤 했다. 쉽게 ‘나사렛 예수!’라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 사랑의 원형질은 예수이고, 그 예수가 황광은의 몸속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호이징거의 유희성이 넘쳐났다. 

결국, 타고르가 말하는 동심과 예수의 사랑, 인간의 유희성이 원천이 되어 황광은의 세계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부드러운 개념들이 융합되어 황광은 목사는 ‘난지도에서 소년공화국’을 통해 솜털같이 부드럽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2년, 황광은은 서울 난지도에 소년시를 건설했다. 그 기금은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제5 독립연대의 기금이 밑거름이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난지도 소년시의 제3대 시장을 역임한 김용호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50년 어느 여름날 아침, 나의 주위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졌다. 이따금씩 들리는 총소리와 더불어 피난민의 대열이 끝없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세상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동족상잔의 끔찍한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나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세상이 뒤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배고픔과 학교에게 갈 수 없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게 된 것이다. 두어 달 뒤부터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공습이 있었고, 유엔군 폭격기에 서울 동대문 시장이 폭격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아버지는 생사불명이 되어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온종일 길거리를 헤매어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전혀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에 탈진된 상태로 길거리에 버려진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 지프차에 실려 한국보육원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한국보육원은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 때 미군 공군의 지원을 받아 고아들 전원이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사건은 로크 허드슨과 안나 카쉬피 등이 출연해 ‘전송가(戰頌歌)’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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