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한국민주주의를 살려낸 학생의 4.19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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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학생들의 시위물결이 전국적으로 정의롭게 넘쳤다. 피 묻은 책가방이 거리에 나뒹구는 4.19 시위 거리에서 꽃목숨 바친 희생 학생은 전국적으로 186명이다. 지금 우이동 4.19묘지 성역에 잠들어 있다. 그럼 이 4.19시위가 일어난 배경이 무엇인가? 원인을 살펴보자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여당인 자유당 후보 이승만과 이기붕, 야당인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조병옥과 장면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신병치료차 도미해 3.15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미국 병원에서 위암 수술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56년도 3대 정부통령선거 때는 선거 10일 앞두고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이승만이 당선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4대 정부통령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에 있었다.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막강한 자유당 여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3대 부통령에 민주당 장면 후보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이 있는 부통령 당선에 눈독을 들인 이기붕은 장면에게 또 패하지 않기 위해 선거관리 부처인 내무부와 정치 깡패집단까지 동원해 가며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자유당 정부통령 투표함에 사전에 40% 부정투표용지를 넣어 두었다. 

내무장관 최인규는 5월에 하기로 한 선거를 5월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선거를 3월로 두 달 앞당겨 실시하게 한 것이다. 사실은 미국에 신변 치료 중인 조병옥 야당 후보가 귀국 전에 조기선거로 유리함을 얻기 위해서였다. 2.28 대구 8개 고교생이 학생을 정치도구로 쓰지말라는 시위를 한 여파에 힘입어 3.15 부정선거 당일날은 마산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다. 4월 11일 마산 김주열 학생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온 국민의 분노가 하늘에 솟구쳤다. 투표결과는 이승만 95%, 이기붕 99%가 나왔다. 경찰은 이승만 88.7%, 이기붕 79%로 하향 조정해서 국민에게 발표했다. 국민의 참정권을 마구 짓밟은 것이다.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바쳐가며 박마리아 아내와 함께 꿈꾸던 부통령 자리를 억지로 차지했으나 온통 거짓 수단의 결과였다. 천인공노할 3.15부정선거는 정의, 진리, 자유, 평화를 부르짖은 백만학도의 순수하고 의로운 사자물결에 진실은 밝혀지고 정부통령 선거는 다시 하게 되었다. 4월 25일 “학생들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 시위에 뒤이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하야성명을 냈다. 대통령 자리까지 넘보던 이기붕 일가는 28일 경무대 관사36호에서 집단 자살로 정치말로의 비극을 보여 주었다. 초대 2대 3대 대통령직을 누리던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은 29일 종로구 동숭동 이화장으로 집을 옮겼다. 허정 과도내각을 세워 둔 이승만은 1960년 5월 9일 조용히 하와이 호놀룰루로 망명을 떠났다. 4.19 학생의 피의 대가로 정권을 쥔 민주당은 내각책임제를 세우며 7월 민의원 선거에서 172석의 다수당이 되었으나 신구파 분열로 약화되어 집권 9개월만에 박정희 군사혁명에 정권을 잃었다. 군사정부는 3.15 부정선거 책임을 물어 최인규 내무장관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정치 깡패 이정재, 임화수 등을 사형시켰다. 애국가 지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라고 외쳤다.

자유당 거짓 독재 정치는 순수한 백만학도의 정의로운 4.19정신으로 무너졌다. 헌법 전문에 올라 있는 4.19정신으로 오늘의 혼란하고 부조리한 정치가 바로 서야 하겠다. 결코 186명의 민주제단에 바친 학생들의 죽음이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학생은 나라의 보배요 내일의 일꾼이다. 4.19 학생들의 피로 살려낸 민주주의를 우리 남북 8천만 겨레는 잘 지켜나가야 하겠다. 그리고 통일도 앞당겨야 하겠다. 서울 4.19 거리를 뛰었던 나도 4.19민주정신이 늘 자랑스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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