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난세의 국가지도자와 기독교지도자 상(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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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돕기 위해 경매에 내놓은 노벨상 메달이 최종낙찰가 1억 350만 달러(약 1336억 원)를 기록했다. 이 낙찰금은 유니세프에 기증되어 우크라이나로 전달되었다.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를 돕겠다니 격이 다르다. TV를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 정치인들이 한심한 생각이 든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어떻게 잘 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게 아니고 상대 당에 대한 약점을 찾아 험담하고 취임한지 1년밖에 안된 대통령을 탄핵감이라고 엄포를 놓고 경제가 어떻고 부인이 어떻고 인사문제가 어떻고 온갖 험담을 하는 것을 보면서 채널을 돌려버린다. 취임한지 얼마 안 된 대통령이 무슨 수로 경제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이전 정권이 저질러 놓은 일 아닌가. 자기반성문을 써도 될까 말까다. 상대 당 흠집을 찾지 말고 자기들이 저질러놓은 일이니 반성하고 진지하게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국민들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대안을 제시해야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나라를 살리고 경제를 활성화할 것인가 하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 한심하다. 당시의 여야의 원 구성 협상이 파행을 빚으면서 국회가 2개월 가까이 멈춰 섰지만 의원들은 매달 20일 월급날이라, 싸우면서도 세비 1285만 원을 받아갔다. 연봉이 7억 5천만 원이다. 국회의원 연봉이 1인당 국민소득 3,36배다. 하루일당이 42만 원이다. 국회의원이 월급처럼 받는 세비는 국민의 피땀 흘린 세금이다. 

지난 정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내로남불과 불공정, 미친 집값 등 실정, 임대차법 등 입법폭주로 민심의 심판을 받은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민주당은 대선패배에도 반성 없이 검수완박 등 폭주를 계속해 작년 6월 1일 지방선거에서도 완패했다. 국민의 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무능의 극치다. 야당은 정부를 비판하려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나라의 곳간을 채우지 못할지언정 자기들 월급가치라도 해서 국민들이 세비를 주는 것이 아깝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 우리기독교가 오버랩 되는지? 이참에 우리기독교도 반성하고 우리자신들의 행동을 뒤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종교지도자들이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교인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헌금한 것인데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 기독교의 갈등도 지금 뒤돌아 보아야 한다. 교회 내 미투사건, 금전문제, 후계목사(세습) 선정 등으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사회는 이제 막 내전을 끝낸 나라를 방불할 만큼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몇 년 전 내전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콜롬비아 내지의 한 마을에 함께 어울려 살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만나 고통과 희망의 얘기를 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진한 감동을 받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간 화해를 통해 이룩한 평화와 정의를 ‘전환기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부른다. 

우리도 6.25전쟁과 권위주의 정권,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과거사청산을 위해 엄청난 정치, 사회적 비용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다. 민주화를 이룩한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에도 청산해야할 과거가 남아있어 전환기적 정의구현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 적폐청산이라는 정치적 구호로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구현해야할 정의를 마치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전환기적 정의인양 정치권이 호도한 결과다. 그로 인한 우리사회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다. 한국기독교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정의와 평화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면 평화를 얻기 어렵고 평화를 지키려하면 정의구현이 어렵다. 그래서 진실은 규명되고 정의는 세워져야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은 난세다. 난세의 지도자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현실과의 조화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내는 지도자여야 한다. 미래를 내다보며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을 담대하게 헤쳐 나갈 용기와 식견,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지도자여야 한다. 과연 교계의 지도자가 존경을 받고 있는 세상인가 돌아볼 때다.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의 국제정세론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는 지금 읽어도 눈이 밝아지는 걸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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