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나의 편안한 말벗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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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를 ‘오마니’라고 부른다. 지금부터 105년 전에 어머니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18살에 아버지와 결혼해서 우리 7남매를 낳아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신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가난했던 신학생을 만나 결혼하고 일제 치하에서 2차대전을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도 아버지를 목사로 그리고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교육한 것은 정말 대단한 여장부다웠다. 가정 형편상 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고 일생을 자녀교육과 목사이신 남편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목사와 교수로 일생을 보낸 아버지는 밖에서는 존경받는 목회자요 교육자였지만, 가정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남편이었기에 그를 내조하고 자녀교육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과 능력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기에게 부과된 업무를 절대로 피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해결해 나갔다. 가족을 위해서는 작은 것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추진해 나갔다. 그런 연후에 그가 미처 환갑도 되기 전에 아버지께서 뺑소니 차량에 의해 19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있는 기간에도 씩씩하게 간병하며 버티었는데, 이는 쉬지 않고 기도하며 굳게 다지는 그의 깊은 신앙심의 결과라 여겨진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어머니가 목사나 학교 교수의 박봉으로 우리 가계를 꾸려나갔고, 자녀들을 교육했는지 의아스럽게 느껴진다. 사실 6·25가 끝난 후인 1956년에 아버지가 비록 장학금은 받았지만, 무모하게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었는지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었다. 이는 모두 어머니가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추진함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된 쾌거였다. 이렇게 어머니는 일찍이 나 같은 약골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엄청난 일을 추진하는 장부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간구할 때도 나는 어머니의 기도의 힘을 믿었으니, 이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접 체험함으로 믿게 되었다. 온 힘을 다해 굳게 믿고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그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귀중한 소통 능력을 어머니는 지녔고 여기에 유머를 곁들인 재담도 일품이었으며, 다행스럽게도 이 재능을 부여받은 내가 때때로 상대역을 맡아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우리가 함께 나이를 들어가면서 더욱 그 깊이가 깊어져 갔다. 따라서 가족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면서 그 강도가 더욱 깊어져 감이 증명되었으며, 이는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연세가 들어가면서 입버릇처럼 하시는 어머니의 소원은 ‘평소같이 생활하다가 며칠을 앓다가 고통 없이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에도 평소와 같이 아침에 쭈그리고 앉아서 정원을 쓸면서 다듬고 계셨다. 식사가 준비되었기에 어머니를 찾아 마당에서 어머니 등에 대고 “오마니 아침 식사 하시자요” 하는데 대답이 없어, 앉아계신 어머니께 가서 등에 손을 대니,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즉시 응급차를 불러 입원한 후에, 어머니 소원대로 4일간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이민가셨다.

지금도 문제에 부딪치면 때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께 물어본다. “오마니는 이럴 때 어찌셨어요?” 그러면 해답이 온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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