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정의 달에 조부모 역할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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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사회복지학 대학원 과정에서 동료 학생들과 노인복지기관 실습이나 방문을 많이 하였다. 그들에게 사회복지학의 여러 영역 중 왜 노인복지를 택했는가 물어 보았다. 놀랍게도 대답은 비슷했다. 자기 조부모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노인복지를 전공으로 택한 이유도 같은 이유인 것 같았다.

나의 조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는데, 우리 손자녀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베푸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손 잡고 시골 조부모님 댁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그때 조부모님께서 자상하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게 좋아 중고등학교 때는 물론 대학 다닐 때도 방학이 되면 으레 조부모님 댁에 내려가 사나흘 지내다 오곤 하였다.

할머니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5일장에 가서 그 당시 귀한 물건이었던 김, 설탕, 계란 같은 것을 사 오셨다. 처마 밑에서 자라던 토마토를 따 예쁘게 잘라서 설탕을 뿌려주시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는 겨우 한 숟가락 대볼까 말까 한 계란찜을 통째로 나에게 차려주셨다. 잘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논에 난 피를 뽑거나 물지게를 지고 반쯤은 흘리면서도 언덕 위에 있는 채소 밭에 물을 뿌려주었다. 내가 결혼해서는 우리 집에 놀러 오시게 해서 아내에게 조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홍어찜을 만들어 드리게 하고, 목욕탕에 모시고 가서 때를 밀어드리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부모님과 나는 친구처럼 지냈던 것 같다.

이런 재미있는 추억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노인에 관심을 갖게 했고, 전공도 그쪽을 택하게 한 게 아닌가 싶다. 나도 지금은 노인 축에 들어가지만 이런 저런 일로 고령의 노인들을 만나면 다 나의 조부모님 같은 느낌이 들어 뭔가 돕고 보살펴드리는 게 즐거운 일이다. 노인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계신 분들을 보면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맘이 씁쓸하다. 노인의 신체와 정신에 일어나는 변화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나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가능성과 한계성을 둔 신의 뜻은 무엇인지, 후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노인들의 간절함이 얼마나 우리 주변을 훈훈하게 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모든 것들은 나에게 학문적 연구주제가 되었다. 내가 노인복지학 학자로 지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려서부터 조부모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과외공부에 치여 조부모와 지낼 기회가 거의 없다. 젊은 부모들은 평소에는 물론 방학이 되면 아이들을 특별과외나 캠프에 보낼 궁리만 하지 조부모 집에 며칠 보내 조부모가 생활하는 모습도 보고 노인 냄새도 맡으면서 지내게 할 생각을 안 한다. 아이들이 노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도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 부모는 아이들이 돌아가신 조부모의 주검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이 교육적이 아니라고 하는 몰상식하고 비교육적 발상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노인과 함께 지내보지 못해 노인을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자기 부모가 노인이 되었을 때 진정한 마음으로 효도하고 돌봐드리는 책임을 감당하려고 할까?

필자는 젊은 부모들이 자녀를 조부모 집에 자주 보내 조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하는 것이 자녀의 인성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조부모와 신체접촉도 하면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기 부모가 노인이 되었을 때 조부모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분명 효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젊은 부모들 가운데 요즈음 같이 부모자녀 별거가 보편화된 시대에 자녀들에게 무슨 효도를 기대하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실 지금의 노인들 중에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부모는 자녀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특히 병약해지면 자녀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부모자식 간에는 물리적,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손자녀와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려는 조부모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손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희망과 고민을 발견해내는 민감성, 그리고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다르더라도 훈계가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상하고 교양있으며 활동적인 모습을 손자녀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결국 손자녀와 좋은 관계를 맺는 대원칙은 그들의 장래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건 부모들이 걱정할 일이니까, 지금 조부모와 손자녀가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김동배 장로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새문안교회 공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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