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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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목회 부임… 남녀 반 휘장 철폐한 첫 교회

장례 사건, 계층 간의 차별 넘어선 ‘예수 사랑’ 실천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 다니던 교인들이 제동 김창제(薺洞 金昶濟)의 집에서 주일 저녁과 3일 저녁 기도회로 모였으니 이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창제, 조중완, 이주완, 장석윤, 유성준 등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박승봉, 황기연, 정경덕, 이수삼 등이 참가하고 박승봉의 주선으로 소안동에 있는 초가를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으니 이것이 안동교회의 출발이었다. 한석진 목사는 신문 관계로 서울에 체류했다. 

대한노회는 1910년 가을부터 한석진 목사를 안동교회의 전도목사로 파송키로 하는 동시에 ‘예수교 회보’ 사장 일은 게일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한 목사는 ‘예수교회 회보’를 맡은 후 1년 만에 사장에서 물러나 교회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한석진 목사는 안동교회를 목회했다. 그 후 1911년 5월 17일 수요기도회 시 박승봉을 장로로 선출하고, 동년 9월 10일 주일 오후에 박승봉 장로 장립식과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안동교회는 조직교회가 됐다. 

한석진 목사가 안동교회에 부임한 후 첫 번째로 한 일은 교회 안의 남녀 석 사이에 쳐 놓은 휘장을 없애는 일이었다. 한 목사는 어느 날 삼일 기도회가 끝나고 교회 직원들을 소집하고 돌연 남녀 반을 가로막는 포장을 철폐하자고 제의했다. 갑론을박 끝에 한 목사의 제의를 받아들인 제직이 많아져서 결의했고 남녀 반 휘장을 철폐한 최초의 교회가 됐다. 예배당 신축 때 이미 남녀 출입문도 구별 없이 하나로 했다. 이 휘장 철폐는 1913년 9월 7일에 개회된 예수교장로회 제2회 조선 총회에 헌의했으나 개교회 형편에 따라 하도록 결의했다. 이때 안동교회는 이미 휘장을 철폐한 한석진 목사의 과단성 있는 목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 한 번은 장덕창이 불의에 모친상을 당했으나 가난하여 남의 행랑 한 간을 빌려서 사는 형편이었으므로 장례를 치를 가망이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한 목사는 박승봉 장로와 같이 그 행랑방에 가서 손수 시신을 다루며 장례의 모든 일을 치러주었다. 이때 그 집 주인 민경호는 양반의 지체로 보아서 박승봉 장로를 우러러보는 처지였는데 그러한 분이 행랑방에 들어가서 하는 일들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탄복하게 됐고 이 일은 북촌 일대에 사는 양반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개화 주의를 주장하던 외무대신을 지낸 유길준도 이 일 후 안동교회에 출석했다. 한석진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을 여러 명 양육했다. 그들 중 윤상훈, 김은호, 윤상찬, 박칠양, 김인식, 이정섭, 정경덕, 이수삼 등이 있다.

휘장 철폐가 남녀 간의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이었다면 장례 사건은 계층 간의 차별을 넘어선 예수 사랑의 실천이었다. 안동교회는 북촌에 사는 양반들 사회에 조용한 의식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 안동교회의 건축계획은 1911년부터 본격화되어 6월에 ‘소안동 예배당 건축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계획도 여러 번 예배당 건축의 경험이 있는 한석진 목사가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배당 건축을 결정했다. 모금한 돈으로 대지를 사니 한 목사가 설계한 벽돌집 예배당 건축에는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김창제와 같이 위원들이 각각 힘닿는 대로 친구에게나 기관에 건축헌금을 “청연(請捐)”했으리란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결과 정동감리교회 교인이었던 윤치오가 1천 원을 헌금했고 연동교회 교인이었던 민준호도 1천 원을 헌금했다. 황기연은 계동에 있던 자기 집 한 채를 헌납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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