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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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예배당 건축에 탁월, 인재 양성에 열심 다해

문창교회 석조 예배당… 한 목사 설계와 노력 결정체

그때 정동에 중국인 건축업자인 모문서(慕文序)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에게 교섭하여 우선 약간의 전도금만 먼저 내고 잔금은 준공 후에 줄 터이니 예배당을 건축해 달라고 요청했다. 1만 원이 되는 거액의 건축비를 외상으로 지었다. 하루는 박승봉 장로와 외무대신을 지낸 박제순을 찾아갔다. 그는 박승봉 장로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국운이 기우는 때 민족과 국가를 건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길밖에 없으니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헌금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그는 두말없이 8천 원을 연보했다. 이로써 모든 빚을 청산했다. 그리하여 벽돌 2층 건물인 예배당을 지어 아래층은 주일학교로 사용했고 역시 벽돌 2층의 목사관도 건축했다. 

한석진 목사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의 진취적이고 뛰어난 지도력에 감동한 많은 청년이 그의 지도를 받았고, 훗날 한국교회와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됐다. 한석진 목사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선비 오건영과 이정로를 박승봉 장로의 사랑에 식객으로 머물게 하여 그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했다. 오건영은 1913년 경충 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면서 목사가 됐다. 한편 한석진 목사는 동경 신학사 교장인 우에무라와 교섭해서 1917년 이정로를 입학시켜 1922년에 졸업했다. 그 외에도 윤상훈, 윤상찬, 박칠양, 김인식, 이정섭, 정경덕, 서정우, 이수삼 등 청년들이 나와 한석진 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한석진 목사는 안동교회를 6년 4개월 목회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안동교회를 세우고 건축하고 혁신적 개혁으로 북촌의 양반들을 역사의 진취적인 인물들로 성장시켰다.

한석진 목사는 안동교회를 목회할 때 각 지방 교회에서 초빙받고 사경회를 인도했다. 1916년 정월 마산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한 목사의 사경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한 목사를 청빙했다. 마산교회에 부임하니 창신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했다. 한 목사는 이만한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남의 학교를 빌려 사용한다는 것은 제직과 교우들의 무성의라 했다. 조속히 예배당을 건축할 것을 권했다. 한 목사는 미약한 마산교회를 1919년 2월 사임하기까지 3년 동안 뜨거운 신앙과 열성으로 교회 부흥에 온갖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무악 산기슭에서 석재를 실어다가 석조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일부 완성함으로 창신 학교로부터 옮겨 예배를 드리니 교인들의 기쁨이 아주 컸다. 준공 못 하고 떠났으나 문창교회 석조 예배당은 한 목사의 설계이며 노력의 결정체였다. 한 목사는 마산교회 재임 중인 1917년에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됐다. 한석진 목사는 총회에서 천주 교인과 결혼하는 일은 위태한 일이기 때문에 당회가 성혼되지 않도록 권면하는 일들을 결의했으며 이때 불신자와 혼인한 사람에게 책벌과 해벌 기한은 당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했다. 당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당사자는 물론 부모까지 책벌을 받았으니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 해벌하도록 했다.

한석진 목사가 마산교회에 부임한 후 1년 반 후인 1917년 10월 21일 이일심 사모가 3남 3녀를 남기고 별세했다. 

그 후 1918년 늦은 봄에 친구 김천일 목사의 주선으로 평원군 출신인 오선신과 재혼했다. 1919년 초 마산교회를 사임하고 고향인 의주에서 가까운 백마로 이사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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