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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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늘은 어디로 모실까요?” 숙경의 음성이 오늘은 더욱 밝아 보였다. “……”

춘원이 아무 말 없이 엷은 미소만 보이자, 숙경은 스스로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지금까지 하던대로 가흥리 계곡 멧봉우리 언덕바지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길이 평탄치 못해 다소 불편하지만 마사토 흙길이라 그런대로 휠체어를 밀기는 괜찮았다.

7월도 다 가는 어느 여름날 오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햇볕은 살갗을 태울정도로 따갑지만, 소나무가 모여 있는 언덕배기에 올라서니, 눈 아래 요란하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간간히 불어오는 산능선 바람은 모두를 시원하게 해 주고 있었다.

“걀걀… 까까…” 아침도 아닌데 이 시간 무슨 까치가 저렇게 울어? 반가운 손님이래두 오시려나?

소나무 가지에서 까치들이 요란하게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춘원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디서 밀려왔는지 하늘 높이 흘러가는 뭉개구름을 춘원은 손가리개를 만들어 햇볕을 피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장소에 와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은 옛적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친근함이 있는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定州) 동네 계곡이 꼭 이와 같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까… 내가 태어난 정주가 바로 눈앞인데… 짐승들이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해 죽는다더니 아마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어 이러는가. 요즘와서 춘원은 남의 일 아니고, 자신이 이제 죽는다는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58년의 한 많은 생을 통해 지금까지 이렇게 밖에 못살아 온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정말 더럽게 살아 온 세월이었다.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났다. 떠나올 때 지하실에 내려가 아들 영근이를 한 번 더 못보고 온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정화, 정란이,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꼭 약을 챙겨 먹으라고 신신 당부하던 아내 허영숙의 애잔한 모습들이, 지금 춘원의 뇌리에 영화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이젠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심하게 하던 기침도 오늘은 뚝 끊기고 자신이 태어났던 고향, 정주에서 어릴 적 뛰놀던 일도 생각나고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도 생각나는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온갖 잡념들이 오늘은 춘원을 몹시 슬프게 하고 있었다.

“선생님! 뭘 그리 골돌히 생각합네까?” 혼이 다 빠져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춘원을 보고 숙경이가 말을 걸어 왔다. 

“응… 내가 지난 날, 좀 생각에 잠겼나 봐.” “숙경아!” 춘원은 숙경을 은근하게 불렀다. “네, 선생님!” “나하고 얼마나 같이 있었지?” “… 한 달도 채 안되는데요. 이틀이 빠진 한 달….” “그렇게 밖에 안되었나? 꽤 된 것 같은데….” 

“숙경아!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 “선생님! 왜 그럽네까? 이제 어디 갑네까?” 숙경은 안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부릅뜨며 물었다. “어딜 가긴… 어딜 가… 그냥 고맙다는 말이지….”

“숙경아 올 해 몇 살이지?” “갓 스물이에요. 그건 왜요?” “숙경은 문학 지망생이라고?” “네, 맞아요. 선생님처럼 글 잘 쓰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야요.” 춘원은 순간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 ‘푸시킨’을 떠올렸다. 푸시킨이 20대에 유배지에서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시가 생각났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 찾아 오리라. //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괴로운 법 /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 가리니 /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오늘 따라 춘원은 이 시를 숙경이에게 문득 주고 싶었다. 산전 수전 다 겪은 춘원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문학 처녀에게 이 시가 그 어떤 무게를 줄 수나 있을까? 하면서….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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