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미국법정 명판결, 우리 법원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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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서 읽고 감동 받은 글이다. 미국 마이애미 롱비치 한 법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착한 어린 형제가 전쟁놀이 하다가 산책 나온 동네 유명 인사 만 불짜리 명마의 눈에 죽창이 꽂히게 하여 그 저명 인사도 말과 함께 낭떠러지에 추락사했다. 법정에 잡혀온 두 형제는 한사코 자기 죽창이 말눈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판사가 한 어린이를 지정하기 어려워 두 형제 어머니를 불러 선택을 요구했다. 법정에 나온 어머니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살인범으로 선택해 달라는 판사의 요구를 받고 잠시 기도 속에 침묵하다가 작은아들을 선택해 주었다. 판사는 왜 작은아들을 선택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큰아들은 전처 소생이고 작은아들은 자기 소생이라 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 않느냐 했더니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며 교회에서 배운대로 그런 결정을 했다고 했다. 또 그런 결정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방청객도 많은 숙연한 법정에서 크게 감동 받은 판사는 “내가 30년 법관생활 해도 이런 감동적인 장면은 처음 겪는다“면서 판사의 권한으로 두 형제에게 무죄선고를 내렸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남편도 없이 두 아들을 차별없이 가정교육, 인성교육을 잘한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정신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어머니가 훌륭한 자식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롱비치 재판정의 명재판이 신뢰 잃은 오늘의 한국 법원에 거울로 귀감이 되길 바란다. 사회가 교회 걱정하는 신뢰 잃은 오늘의 기독교 사회도 롱비치 두 형제 어머니 믿음을 본받아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한 나라에 종교, 교육, 법조계가 썩으면 그 사회 그 나라는 희망이 없고 멸망길에 놓이게 된다. 일제시대 변호사로서 우리 나라 독립운동한 애국지사를 위해 변호사 활동을 했던 애산 이인 선생 가인 김병로 변호사야말로 훌륭한 한국 법조인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애산 이인(1896-1979) 선생은 1923년에 변호사가 되어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의열단 사건 변론부터 시작하여 항일변론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변호사였다.

무료변론을 맡았던 일제시대 애산 이인 선생 변론 활동은 통영민중대회사건, 고려혁명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수원고농사건, 광주학생사건, 애국가를 지은 도산 안창호 독립운동가 사건, 형평사사건 등 수백 건의 항일운동에 자진 무료 변론을 했다. 법조인으로서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여 1942년 10월에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 2년여 옥고도 치르었다. 광복후 검찰총장, 초대 법무장관, 제헌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법과 양심에 따라 살아간 명법조인이었다. 1976년 한글학회 건립기금 3천만 원을 비롯하여 돌아가실 때 전재산을 한글학회에 바쳤다. 광복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 법조인도 광주학생사건 변론에 앞장 선 항일 변호사였다. 애산 가인 법조인이 살아 활동한 법조계는 법과 양심이 살아 있는 법관들이 많았다.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사리사욕에 따른 부실 재판이 오늘날 양심을 짓밟고 있다. 미국 마이애미 롱비치 어린 소년 두 형제의 살인사건을 명재판으로 끝낸 그런 법과 양심 인간성이 살아 있는 명법관들이 한국에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이 미국 명재판이 한국 법원 거울같은 교과서가 되길 바란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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