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이었던 고 전영택 목사는 “예수의 도리로 새로운 민족성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기독신보〉1927년 10월 26일자에서 “우리는 본래부터 있던 우리 문화 위에 새로운 기독교를 받았고, 우리 민족성이란 밭에 예수의 복음이 심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예수의 도리로 새로운 민족성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한국기독교는 열심히 전도만 하고 예배만 드렸던 공동체가 아니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나만을 위해 복을 비는 무당종교인으로 살지 않는다. 이웃이 보이고, 민족이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를 지금보다 잘 믿었던 우리 선조들은 전 인구의 1.5%밖에 안되는 교인수로 삼일운동을 주도하였고, 민족을 계몽하고 문화를 만들어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신문과 잡지를 간행했는데, 신문 9종, 잡지 105종, 선교사 간행 잡지가 7종이나 되었다. 1923년 기독교 지도자 1천257명이 <조선기독교창문사> 창립하였고, 초대 사장에 월남 이상재가 취임하였다. 창문사의 정기간행물에는《신생명》을 비롯하여《어린동무》《조선동요집》 등을 간행하였다. 기독교는 한글 연구와 보급운동을 벌였는데, 춘원 이광수는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다”라고 말하였다. 한글의 큰스승 주시경이나 이윤재, 최현배 같은 한글학자들이 모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교회 부설의 수많은 야학과 서당, 강습소 등이 생겨났다. 최초의 점자 개발을 한 박두성 선생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개발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민족 역사 바로 가르치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남궁억의 <조선이야기>,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김교신의 <조선지리소고> 등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조만식, 김동원 등이 주도한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도 기독교가 주도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금주, 금연 운동도 벌였다. 당시 조선이 술 때문에 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주일성수, 축첩 중지, 제사 중지, 노름 중단, 금주·금연을 세례를 위한 조건으로 하였다. 이제 물어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교회당의 모습 외에 어떤 문화를 만들고 있는가? 이웃이 보이고, 민족이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는 교회 문화 창출이 아쉽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