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선교] 책임자 없는 오판(誤判)의 위험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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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효를 내내 따라다닌 손가락질. 아버지로 인해 시작된 지독한 굴레. 둘째 아들 최명호(가명)는 아버지가 사형수라고 적혀 있는 제적등본을 보여주며 말했다. “학부모들이 사형수 아들에게 자식을 맡길 수 없다고 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형이었는데, 우울증에 시달리고 학교 선생도 그만둬야 할 정도로…”라고. 잔혹한 비극은 1982년 여름밤, 최을호가 낯선 이들에게 끌려가면서 시작되었다.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실종 신고했다 아버지를 찾아주겠다고 경찰들(?)이 집에 찾아와 머물렀는데 그들이 마을을 떠난 날 조카 최낙전과 최낙효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가족들이 이들의 소식을 알게 된 건 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각각 사형과 15년을 선고받은 아버지와 조카는 간첩이었다. 판결문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의 지령으로 조카들을 포섭해 1958년부터 20년 동안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1986년 5월 27일 최을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반전은 아버지 사형이 집행된 뒤 낯선 남자가 최명호를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둘째 아들이지? 내가 자네 아버지 사형 때 입회하여 유언을 들었는데 자네 아버지는 간첩이 아닌 것 같아. 자네 부친은 “아무런 간첩 활동을 안 했는데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것이 억울합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체념하고는 사형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네.” 낯선 남자는 바로 최을호의 마지막 예배를 집례했던 문장식 목사였다. 그는 최을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자세히 보관하고 있었다. “이분은 마지막까지 누명을 쓰고 반공법으로 죽게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했으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갔다. 간첩이 사형당하면 다들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그래서 무죄를 확신하고 최을호 씨 가족을 방문했다”고 했다. 이상한 간첩 최을호는 고향마을의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심포초소와 망해초소 등의 위치를 파악하여 북에 알려줬다는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초소들은 방위병(국가공익요원) 혼자 보초를 섰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곳으로 특별한 군사기밀 시설이 아니었다고 마을 사람 모두가 증언하고 있다. 그냥 일반 초소였다. 또한 1966년 공작금 50만 원을 받아 20만 원을 조카 최낙규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최낙규 역시 1천 원권 200매 한 다발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1천 원권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한 때는 1975년 8월 14일부터였다. 1966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1천 원권을 무슨 수로 주고받았다는 것인가?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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