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66) 

Google+ LinkedIn Katalk +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 4>  영암교회의 목회 ②

사례비 인상도 사양하며 거절

생전에 후임으로 임옥 목사 추천

아이들 성경책 나눠 주심 기억

교회 섬김이 철저한 하나님 뜻

한편 당회에서 사례비를 올리려 하면 황 목사는 늘 사양하며 거절하곤 했다. 교회 예산에서 교역자 사례비 비율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황 목사는 임종하는 해인 1970년 봄에 자기 후임으로 미국에 계신 임옥 목사님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물론 당회에서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살하였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 목사님은 가셨다. 그는 자기가 곧 숨지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하신 것인지 모른다. 황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 이 말이 씨가 되어 당회는 임옥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황광은 목사가 영암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할 때 영암교회 교회학교 유치부와 초등부에 출석하던 한윤천 목사(현재 시카고 에버그린교회 담임목사)는 황광은 목사의 27주기가 되는 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황 목사를 추모하고 있다.

황광은 목사님은 어린이를 끔찍이 사랑하셨던 분이십니다. 황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영암교회에서는 해마다 5월 첫째 주일을 ‘꽃주일(어린이주일)’ 로 지켰습니다. 그 예배 시간에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신약과 시편이 합부된 조그만 성경책을 손수 나누어주시던 목사님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아직 그 조그만 가죽 성경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식 혹은 형식적으로 주신 성경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정성껏 하나하나의 손에 쥐어주시던 그 손길, 아직도 그 때 그 어린이들의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안경낀 사람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안경을 끼신 황광은 목사님을 처음 본 아이들은 그 굵은 안경테 때문에 목사님이 무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목사님이 “우리 친구 잘 있었니?”하시며 어린이들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실 때 그분은 금방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가지각색의 목소리를 동원해서 이야기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그 이야기의 나라로 술술 빨려 들어가곤 했습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점점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황광은 목사님은 어린이들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누구처럼 ‘성경제일주의’, ‘성경근본주의’를 외치지는 않으셨지만, 제가 아는 황 목사님은 목사님들 가운데서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신 황 목사님의 모습은 어린이를 영접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요즘 어떤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헌금도 많이 못하는 아이들 많아봐야 교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시끄럽고 망가지는 것들만 많아서 예배에 방해가 되고 지출만 늘어난다’고 불평하신답니다. 그러면서 정통이니 근본이니 보수니 따지는 모습, 제가 어려서 황광은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 배운 것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입니다. 앞장서서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 신앙의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던 황광은 목사님! 목사가 된 제 모습을 지금 감히 황광은 목사님 앞에 불현듯 내어놓았다가는 황급히 철회합니다. 목사님께서 철없는 저희들을 사랑해 주셨던 것처럼 저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황광은 목사님의 인격과 삶을 깊이 사모합니다.

공동체로서의 교회

황광은 목사의 목회자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김창걸 장로님이 상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황 목사의 영암교회 10년 목회 생활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으며,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내조자인 김유선 여사일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황 목사의 면모에 대해서 김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영암교회 목사로서의 10년은 모범적인 목사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범적인 교회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가 목회하는 목사로 영암 교회에서 10년을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뜻도 아니요 그의 희망도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서 교회를 섬기게 하셨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이 목회 목사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졌었고, 자기의 사명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형적인 목사님들처럼 새벽 기도회를 꼬박꼬박 인도하지도 못했고, 심방도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교계 전반에 관계되는 일, 어린이들을 위한 일, 대외적인 많은 일에 관계를 가지고 늘 바빴기 때문에 영암교회에 대해서 미안한 생각을 많이 가졌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해마다 연말에는 사의를 표하거나, 아니면 사례금도 가급적 적게 받으려고 했었다. 그럴 때면 교회의 태도는 또 언제나 관대하기 짝이 없었다. “황 목사가 영암교회 하나만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한국 교계를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하면서, 황 목사의 생각은 이해하면서도 늘 만류하곤 했었다. 

그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사회사업의 길은 안 열어주시고, 교회에 점점 발이 깊어지게 하시는지 모르겠다.”

그의 뜻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손은 그를 목회자로 끝마치게 하신 것이다.

목회 생활에 있어서의 그의 목표는 성령의 공동체를 위한 모색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사랑의 봉사로써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기에 힘썼던 것이다.

영암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던 1964년, 그 약사에 나와 있는 서문 황 목사의 글 전체를 인용해 보도록 하자.

교회는 성도의 믿음 위에 세워졌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영암교회의 짤막한 10년사도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바로 10년 전 여기 낙산 맞은편 언덕 위에 몇몇 믿음의 동지가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자라서 오늘은 150세대 500명의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동산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살았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며 자라왔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인가귀도와 노유동락의 성도의 교제를 목표로 제단을 쌓았고, 대외적으로는 조국과 겨레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봉사의 생활을 늦추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불러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 교회의 염원을 교회 분열의 물결 속에서 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일을 힘써 지킴으로, 교회의 독립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단을 봉쇄해 본 적이 없는 소망의 공동체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지나온 10년을 기념하면서 성전을 봉헌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올 또 하나의 10년을 위하여 <현대적 고민과 한국교회>란 조그마한 강연집을 교계에 바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