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재단법인 영란선교회 이사장 최영석 공로장로(동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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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모든 것, 주님 위해 사용되길 바랍니다”

동신교회 공로장로 최영석 장로는 1939년 황해도 풍천읍에 위치한 할아버지댁에서 태어났다. 당시 풍천읍의 집들은 전부 전등이 들어오고 전기동력을 쓰는 정미소가 세 군데나 있는 지역이었다.

그가 자란 할아버지댁에는 당나귀로 기름을 짜는 연자맷돌이 있어 가을에 기름을 짤 때에는 기름 짜는 방에서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자고 가기도 했다.

최영석 장로의 외가는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서곶리 칠봉으로, 외가는 옆 마을인 서의동에 위치한 서꼴교회(서의동교회)에 다녔다. 서꼴교회(서의동교회)는 외증조부이신 이형곤 님과 그의 형제들이 개척한 교회로 기와집 10칸의 큰 예배당이었다.

최 장로는 공산치하인 1949년경 소학교 5년을 마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봤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간단한 구술시험이었다. 면접관이 ‘너 교회 가는구나’라고 물어서 ‘네, 교회 나갑니다’라고 답했다. 면접관이 일요일에 학교에 나오라고 하면 학교에 올 건지 교회에 갈 건지 묻는 질문에 그는 ‘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죠’라고
대답했고 중학교에 낙방했다고 말한다.

“내 동기 중 나처럼 대답해서 낙방한사람이 4-5명 되었어요.”

타지로 진학할 형편은 아니었던 최 장로는 집에서 농사일을 열심히 도왔다. 벼못줄 잡고 모판 나르고 밀과 감자를 심고, 목화를 따는 등 농사 짓는 데에는 다 따라다니며 열심히 일했다. 할아버지댁 논, 밭, 과수원과 아버지 분가 이후 아버지의 논, 밭, 과수원이 각각 있어서 할 일이 많았다.

그는 소학교 졸업 후 약 2년간 농사일에 힘썼다. 목화 농사도 해서 가을에는 물레질을 했으며, 평양에서 양말 기계를 사다가 양말을 만들면 팔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장연읍에 걸어가 그곳에 사시던 외삼촌이 양말 짜는 것을 보고 오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가 평양에서 양말 기계와 바늘 등 필요한 도구를 사오셨고, 최 장로가 물레로 실타래를 만들고, 집에서 직접 곤색으로 염색했다.

“당시 사람들은 집에서 만든 버선을 많이 신었습니다. 흠 잡을 데 없는 진짜 양말을 50개, 100개씩 만들어서 5일장 시장에서 팔았어요. 나중에는 제가 아버지보다 양말을 더 잘 짜게 되었어요. 저는 이때 양말을 만들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8년 후에 메리야스 공장을 하라고 훈련시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 찾아 떠난 피란길

최영석 장로는 “1950년 한국전이 발발했다. UN군이 참전하고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으며 황해도에도 국군이 들어왔다. 10월 말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어 12월 4일 국군은 평양에서 철수하고 1월 4일 서울도 내어주게 된다. 이때 풍천읍을 떠나며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오겠다던 국군은 봄, 여름이 가도록 다시 오지 못했다. 풍천읍의 장정들은 인민군이 무서워서 피란을 갔는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형님도 백령도로 피란갔다. 작은아버지는 이후 해병대에 입대해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동생들만 남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후 초도로 피란가는 사람들이 생겼고, 마을에 남아있던 최 장로의 가족들도 급하게 짐을 싸서 초도로 떠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 작은아버지 내외와 아이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의 가족 등 총 16명의 가족이 피란에 함께 했다.

당시 공산 정권은 교회에 못을 받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지역 교회 장로, 교역자들 역시 다 피란을 떠났고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처형 소식도 들려오자 마음껏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남쪽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최 장로의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어 초도 포구에서 매일 열리는 장에 나가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군함을 얻어 타고 군산을 들러 목포에 도착해 진도군 이매면에서 일 년을 살았다. 그 후 부산을 거쳐 서울 동대문에서 뚝섬 가는 철길 옆쪽 빈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최영석 장로와 가족들은 부산에서 알던 장로님들이 다니시던 동신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함께하신 길

“부모님은 속옷(메리야스) 장사를 하시고 저도 일을 거들었어요.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아현동의 메리야스 공장을 가보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묘역에서 중앙시장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근처에 공터가 있어서 그리로 천막을 네 칸으로 넓혀 이사를 했죠. 반은 공장, 반은 살림집으로 했고, 부엌이 있었지만 전기도 수도도 없는 집에서 공장을 시작했어요. 메리야스 기계를 들이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휘발유 발동기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최영석 장로는 공장 초기부터 십일조에 힘썼으며, 매출의 1%를 이익의 십일조로 보고 사과궤짝에 매출 1%를 그때 그때 모아 헌금했다.

고등학교 3학년에 메리야스 공장을 시작한 최 장로의 사업은 한창 때 40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시장의 변화로 23년만인 1981년에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1982년 부채가 많은 ㈜창동흥업을 매입한 최 장로는 약 15년간 기업의 부채를 전부 상환하며 건실하게 경영했다.

“해당 부지에 국내 대형 건설사가 매각을 제의해왔어요. 매각과 건축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경험이 없는 우리가 건설업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매각을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매각한 자금의 2/3를 영란선교회에 출연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과 저희의 건강한 몸, 마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기에 보람있게 사용하고자 기도했고 그 기도는 영란선교회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란선교회

영란선교회는 1996년 10월, 최영석 장로와 그의 부인 김상란 권사의 기부와 헌신 아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선교기관으로 출범했다. 두 사람의 이름을 빌려 ‘영란선교회’라 칭했고, 당시 문화체육부의 등록(398호)을 거쳐 재단법인으로 정식 출범한 것이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년이 지나며 수많은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의 땀과 눈물로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활짝 꽃 피었고 많은 열매로 거둬지고 있습니다. 또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제개발의 성과로 소득이 상승하고 경제체제가 선진화되었고,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인구가 이동하면서 도시화 역시 빠르게 진척되었습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에 집중된 복음화 운동의 결실로 개신교 신도 수는 1995년 기준 850만 명(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전국민의 19.7%)을 초과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한국 교회와 선교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이면에는 지역 및 교회 간 불균형의 심화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농어촌 지역의 복음화율이 도시지역보다 5%포인트 이상 낮고, 많은 미자립 교회들과 취약한 선교단체들이 하나님의 구령사업을 실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의 측면에서도 한국 선교의 양적 및 질적 성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영란선교회는 ‘전하는 자 없이는 들을 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선교에 작은 불꽃 하나가 되고자 선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도우며 선교기관의 사업을 지원하고, 장학 사업을 통해 인적자원을 양성함으로써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선교 활동을 뒷받침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선교의 한 첨병으로서 개척지역을 넓혀 땅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도록 힘을 다할 것입니다.”

영란선교회 설립 당시 최 장로는 32억 원을 출연하였으며 그 중 22억은 현재 영란선교회가 위치한 건물을 매입, 10억은 선교자금으로 운영됐다. 최 장로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 본인의 나이나 자녀들의 상황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결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이야기한다. 자녀들에게 남긴 물질이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게 아니란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최영석 장로는 영란선교회를 시작하며 스스로 몇 가지 다짐을 했다. 법과 규정을 제대로 지키고 가능한 한 조용히 일하며, 일할 때는 신중하게 결정하되 그 이후에는 기도로만 돕자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원칙에 기반을 둔 신중한 접근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선교회 운영비를 절약하며 효율적으로 선교사역에 전념해 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순조로운 투자 결과 현재의 선교회 기본 재산은 설립 때와 비교해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란의 발자취

1996년 출범 후 문화체육부의 허가를 바탕으로 활동을 시작한 영란선교회는 중국과 서사모아 등 해외선교를 시작으로, ‘부활의 집’ 건축, 원양교회 봉사관 건축을 지원, 서울동노회 세계선교기금, 귀국선교사 복지기금 후원, 엘로힘교회 개척 지원, 중국 선교 지원, 서사모아FCSS(Faatuatua Christian Secondary School) 건립, ‘은혜의 집’ 건축, ‘지게의 집’ 건축 지원, 마장교회 건축 지원, 남선교회장학재단 기금 지원, 실로암안과병원 건축 지원, 필리핀아태장신대 건축 지원, 설곡교회 건축, 탄자니아 교회 건축 및 굴삭기 지원, 인도네시아 선교센터 건축 지원, 서부제일교회 개척 지원, 필리핀 선교센터 건축 지원, 네팔 한솔아카데미 버스 구입 지원, 탄자니아 모로고로 학교 건축 지원 등 국내교회, 선교기관 및 장학·복지사업과 선교사역에 앞장서고 있으며 누적사업규모가 43억 원에 달한다.

앞으로의 영란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기도 제목은 주님께서 통일을 허락하시어 영란선교회가 풍천읍교회를 비롯한 북한 교회들과 농촌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식을 전하는 일이 조용히 일하자는 신념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역사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전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영란선교회가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소명처럼 앞으로도 지역사회의 불균형과 교회 간의 불균형을 좁혀가는 가교 역할을 이어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국내외 선교기관들에 대한 지원의 열매도 지금처럼 풍성하게 주렁주렁 맺혀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영석 장로는 ‘격려하는 사람’, ‘위로하는 사람’, ‘축복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최영석 장로는 “때로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이 삶까지 연결되어 살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복되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전한다.
/석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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