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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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한 기도의 응답”

꿈·용기 없던 청년, 주님과 함께 ‘성공한 사업가’, ‘정치가’, ‘만학도’로 꽃피워

“가정형편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 대신 한학을 익히기 위해 마을에 있는 되목서당에 다녔습니다. 당시 머리가 좋아서 천재라고 불리며 잔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가 뭔지도 모르는 내게 선배 한분이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해 15리나 떨어진 교회에 가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17살,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내게 성경 말씀과, 주님이 모든 것을 이뤄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는 저에게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새벽예배를 갈 때면 언덕에 놓여있는 상여집도 지나야 했는데, 무섭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찬송을 부르며 다녔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온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는 가정의 어려움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1996년 검정고시, 1997년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해 50대 후반의 나이로 만학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학업 뿐 아니라 사업과 문학 부분으로도 두각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왔다.

한국현대인물열전 33선 등재, 대한민국 인물대상 수상, 한국민족정신진흥회3.1운동 100주년 한국인물사 등재, 미국 마퀴즈 2019년도 세계인물사전 한국인편에 등재된 바 있는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는 보은 성경고등학교를 거쳐 대전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의 꿈을 꾸다 군입대를 통해 경리학교로 차출됐다. 대학생들과 같이 경리학교에 가게 된 양 장로는 ‘하나님이 선하게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모든일에 임했으며 결국 높은 학업성적으로 부산 항만사령부 경리과에서 군복무를 하게됐다.

당시 항만사령부는 민간인 항만업무까지 관리했는데, 민간인들과 함께 근무하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그결과 양한석 장로는 이곳에서 정말 많은 사회적 경험과 인생에 대해 배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군 복무 중에도 주일 성수를 빼놓지 않고 지켰던 그는 주일 오전에는 부대 내 군인교회에 나갔고 오후에는 민간인 교회인 문현중앙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그를 눈여겨 본 교회의 김영오 장로는 그에게 제대 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목사가 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사업을 해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것도 좋은 방향이다. 내가 하고 있는 포장사업을 건강상 이유로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한 양한석 장로는 3년이 지났을 무렵 사업을 인수했다.

“당시에는 신발, 내의, 섬유, 봉제 등을 전부 골판지 박스로 포장했기 때문에 포장 박스가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였습니다. 덕분에 금성사 부라더미싱, 대한도자기, 동산유지 등 많은 대기업에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사업수완과 성실함은 그의 사업인 신진수출포장을 날로 번창케 했고 1975년 부산 사상공단에 제일 먼저 입주했다. 이후 모아온 재산으로 사업에 재투자 한 결과 1986년 약 2천 970m² 규모의 사업을 약 1만 3천m²로 확장해 김해시 장유면으로 이전, 또 다른 사업체인 ㈜SEP(주식회사 신진팩)는 2020년 진례면에 위치한 5천 평 부지로 옮기기도 했다.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위치한 신진수출포장과 (주)SEP는 1968년에 설립된 향토기업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평균 수명이 12.5년이라는 통계에 비춰볼 때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신진수출포장의 주력 제품은 수산물 포장지로, 포장용 종이박스와 포장지를 러시아 연방국가 등에 수출하고 있고 국내에는 주문생산방식을 통해 납품, 연간 1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골판지 포장업계에서는 국내 최장수 기업이라 할 만큼 오직 한 길만을 보며 달려왔다.

사상에서 장유면으로 회사를 이전하며 모든 생산설비를 자동화시스템으로 탈바꿈한 후, 2007년에 (주)SER을 설립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의 남다른 노력으로 인해 신진수출포장·(주)SBP는 방수와 신선도 유지에서 단연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

새벽 4시가 되면 일어나 새벽 기도를 드린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양한석 장로는 지난 날의 역사를 한 마디로 ‘에벤에셀’(삼상 7:12)이라 표현한다.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부산광역시 남구의회 초대의장

혈혈단신의 몸으로 시작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선 양한석 장로는 장유 기업체협의회 회장, IBK 기업은행 부산 최고 경영자클럽 회장직 등을 맡으며 부산의 상징적인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80년, 당시 40대였던 양 장로는 급성활동성 간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 부친상조차 제대로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그는 3개월 입원 후 퇴원하면서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를 느끼고 그 길로 감산 기도원을 찾았다.

“기도하면서 윤리적으로 많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경영과 이윤에만 치중해 직원들의 인권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으며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양한석 장로는 부산남구의회 초대의장을 시작으로 정치에 몸 담았다.

이후 양한석 장로는 자신의 기업은 물론,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역 동장의 권유로 사회정화위원장 활동을 시작으로 거리질서운동, 불우이웃 돕기 등을 하면서 구청 사회정화사무국 사무국장에 천거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1986년, 광주 동구에 찾아가 자매결연을 맺으며 영·호남 간의 갈등 완화에도 이바지해 그해 11월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그의 지역 봉사활동이 세간에 알려지자 정치적 입지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일류대학 출신 및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부산광역시 남구의회의 초대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양 장로의 정치 행보는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자체 의회 4년 후 치러진 지자체장 선거에서 구청장 후보로 당선되어 지부를 거쳐 중앙당에 올라 갔지만 선거운동 중 갑자기 후보자가 바뀌게 되었다. 중앙당에서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 공천을 바꿔준 것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그의 공식적인 최종학력은 초등학교였다. 고등공민학교, 성경고등학교, 대전신학교가 모두 비인가 학교였기 때문이다. 비록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부산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 하버드대 법정대학원 고위정책연구과정 등 8개나 되는 과정을 마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였기에 학력 미달은 너무도 뼈아픈 상처가 되었다. 그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상처를 씻어 내기 위해 만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만학도 양한석

“사실 자존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기도를 했었어요. ‘하나님 내가 언제 정치한다고 했습니까? 왜 이렇게 망신을 줍니까? 그 망신은 하나님 망신이 아닙니까’하고 기도했죠. 그런데 하나님은 ‘학력미달이면 도전을 하면 될 것 아니냐’하고 마음에 울림을 주셨어요. 거기서 용기를 얻어 지천명이라는 나이도 잊고 검정고시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중고교 6년 과정을 7개월 만에 마친 양한석 장로는 3개월 후 수능을 위해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열심히 한 만큼 성적이 잘 나왔던 그는 입학원서를 넣었던 동의대 정치행정학부와 동서대 외국어학부에 복수 합격, 동의대에 최종입학했다.

“학부제였기에 200여 명이 모여 수업을 듣는 대학 입학 첫 강의 때였어요. 화장실에 갔다가 맨 뒤에 앉아 있는데 한 학장이 ‘여러분들은 복이 많은 학생들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할 양한석 의장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와 인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인사를 하게 됐던 적이 있답니다.”

양한석 장로는 “인생의 선배로서 학생들을 다독거리며 때론 친구처럼 지내 제가 있는 반의 출석률이 가장 좋았다”며 “공부가 한이 되어, 졸업장이나 받으려고 한다는 시각을 불식시키며 수업 시작 10분 전에 가서 맨 앞에 앉아 다른 학생들보다 모범을 보였다”고 이야기한다.

양한석 장로는 만학도로 석·박사를 수료했다.

그는 만학도로서 보통 사람이 꿈꾸기 힘든 꿈을 꾸었다. 학부과정에서 공부에 재미를 느낀 양 장로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겠다는 원대한 설계를 하고 바로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석사논문의 제목은 ‘탈냉전기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이었다. 석사 후 박사과정을 연달아 이어간 그는 지도교수와 토론을 해가며 자신의 구의회의장 시절 실무를 바탕으로 논문의 주제를 삼았다.

남구의회 의장 시절 정책을 결정하기 전 관계자들과 토론과정을 거치는 등 의견교환을 거쳐 중립을 지키면 문제가 없는데 그 과정을 무시한 채 구청에서 올린 안건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놓고 보면 꼭 민원이 발생하는 등 시끄러웠다고 한다. 양 장로는 이런 문제의 개선책에 관한 논문을 썼다. 지자체장들이 낙동강 문제 등을 해결할 때 환경단체들의 의견을 들었더라면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관련 사례로 낙동강 수계관리정책과 시화호 개발사업을 사례로 선정하여 분석했다. 논문 제목은 ‘정책과정에서의 정책네트워크와 파트너십 : 한국환경정책과정 사례를 중심으로’다.

정치학회 정회원인 양한석 장로는 박사학위 취득 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지만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 시와 수필을 쓰며 신문에 시의적절한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4대~21대(현) 평화통일자문위원, 국가원로회의 자문위원, (재)21세기 포럼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양한석 장로는 계간 ‘문예운동’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월간 ‘문학세계’를 통해 수필가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시집 ‘푸른 꿈과의 동행’, ‘양지로 서는 자유’, ‘내 안의 세상보기’, 산문집 ‘아직도 꿈꾸는 사랑과 동행’, 칼럼집 ‘미래보기와 삶의 지혜’ 등 5권의 책을 발행했다.

“시를 쓰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양한석 장로는 말한다.

이런 그의 시에 대해 최창도 시인은 ‘인간정서에 접목한 신앙과 자연의 시편’이라는 제목의 작품해설 말미에 “우선 그는 규격화된 세상이나 인간성의 외면보다는 내면의 중요성을, 그리고 인간의 가치관도 물질적인 면보다 정서적인 면모를, 또한 사랑과 평화, 양보와 용서의 근간을 이루는, 더불어 살며 공존하는 화평한 세상을 꿈꾸는 시인임을 알다. 소박하고 진솔성 있는 그의 시에 담긴 시어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믿음과 성찰로 보여진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든든한 밑천

부산 남구의회 의장을 역임한 양한석 장로는 그간 지역민들의 진정한 심부름꾼으로서 땀흘릴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밑천은 바로 자신의 가정이었다고 말한다.

양한석 장로와 그의 가족들

“제가 단순히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의정에 임하기보다 이웃들과 함께 가슴으로 함께하는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인 저를 항상 믿어주고 따라준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인 김광자 권사와 2남 1녀를 두고 있는 양 장로의 가정은 ‘꿈을 갖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자’는 가훈을 갖고 있다.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에서 석사, 부산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장남,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잘 경영하고 있는 차남, 미얀마어를 전공한 딸, 초등학교 졸업식 날은 오바마 대통령상, 고등학교 졸업식 날은 트럼프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손주들까지 하나같이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양한석 장로는 부인 김광자 여사와 17세에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주일학교 교사일 때 주변 분들이 도와주셔서 부인과 연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나오던 형님에게 암호로 편지를 써서 주면 김 권사에게 건네주고 몇 년을 그렇게 했죠. 형님이 메신저 역을 해줬습니다. 군입대와 사업으로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편지와 가끔씩 고향에 들를 때면 만나서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준 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자리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 있어 성공의 가능성은 1이라는 숫자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 +1은 성공확률 1%로 보면 됩니다. 모든 일은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 따를 때 성공을 할 수 있으며, 아울러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0대에 부산 문현중앙교회의 장로장립해 부산노회 노회장, 전국5개권역 300만 성도 증원 운동 영남지역(부산·울산·경남·경북·대구) 본부장의 역할로 봉사한 양 장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열심히 뛰며 사회활동을 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가정형편에 있는 학생들의 학구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꿈이 없는 이는 매사가 부정적이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이 있어야만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고 그 꿈을 이루어 성공했을 때는 반드시 사회에 봉사를 하는 것이 제일 큰 미덕인 것이죠. 저에게 찾아온 기회와 성공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남은 여생도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에만 전념하며 살고자 합니다.”

/석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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