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정봉덕 장로 (24) 만남의 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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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교회만 섬긴 복있는 사람

아내는 경우가 밝고 예의가 분명한 사람이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알뜰해서 집에서는 전등도 하나만 켜고, 걸레도 늘 삶아 빨아 수건처럼 깨끗하게 사용한다. 검소하기로는 세계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참 다행히도 두 딸들이 아내의 그런 점을 고스란히 닮아 결혼을 해서도 알뜰하고 검소하게 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내는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아주 큰 복이다. 아내를 잘 만난 덕에 지금껏 욕 안 먹고 공적 생활을 잘할 수 있었다. 가정 살림이나 아이들 양육을 아내가 알아서 잘해 주었기에 내가 바깥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큰 수술을 받고 두 달 남짓 병원에 누워있을 때도 이틀을 제외하고는 계속 내 곁을 지킨 사람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장로의 딸이자 장로의 아내인데 유감스럽게도 교회 생활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것은 아내의 교회 생활을 열심히 돕지 않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했다면 어땠을까.

요즘에는 세상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아내가 혹시라도 내 뒤에 혼자 남게 되면 어쩌나 싶어 아내를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늘 ‘놀 줄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저 사람을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으면…’ 하고 생각한다.

내가 조실부모하여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자녀들만큼은 부모의 따듯한 사랑 속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엄격한 기준을 대기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자녀들이 스스로 깨달아 성장하도록 늘 마음을 썼다.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아이들이 부모의 바람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좇아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셋째 딸 혜연이는 서울여대 영문과를 나와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했다. 나는 혜연이가 서울여대 교수나 목사의 아내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 아이는 졸업 후 결혼을 하여 지금은 전업주부가 되어 딸 둘을 낳고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장남 태훈이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 신학교에 보냈다. 지나친 욕심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유학을 보냈는데, 중간에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 귀국했다가 마음이 변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은 자영업을 하고 있고, 며느리가 손녀 지은이와 손자 지형이를 잘 기르며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다. 둘째 딸 혜경이는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사위가 미국 회사에 근무해 대우를 잘 받고 있어 살림이 넉넉한 편이다.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막내아들 태희는 아직 미혼이라 좋은 짝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나와 아내가 매일 기도하고 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나는 바깥일로 아내는 집안일로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아이들을 더 잘 키우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나름으로는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그래도 아이들 모두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 마음에 신앙이 확고하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내 평생 한 교회, 염천교회

내 평생의 신앙의 터가 되어 준 염천교회는 언제나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956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총회 전도부에서 일하게 되어 중하리 경동제일교회에서 서울 시내로 이사했다. 남달리 책 욕심이 많았던 나는 수중에 있는 한 달 월급 2만 원으로 1천100 쪽 분량의 두꺼운 ‘기독교 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발행)을 구입했다. 한 달 월급을 책 한 권에 몽땅 쏟아부었으니 학교 등록금을 낼 돈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방 전셋돈을 빼내어 등록금을 해결했다. 머물 곳은 잃어도 공부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리 끝에 짐을 챙겨 대한신학교 숙직실로 들어갔다. 당시 염천교회는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대한신학교 서무과장이던 김성수 목사가 염천교회를 시무하였기에 교회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짜로 얹혀살던 숙직실이 서무과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경동제일교회는 학교에서 너무 멀고, 무엇보다 교통비도 없던 시절이라 계속 다니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염천교회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영천교회는 내 신앙의 자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집사가 되어 유년부 부장과 제직회 서기를 오랫동안 맡아 했고, 1967년 장로장립을 받아 1998년 1월 정년 은퇴할 때까지 나와 신앙의 여정을 함께했다. 일생에 걸쳐 한 교회를 섬기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한 교회만을 섬기게 되었으니 나는 교회 복이 있는 사람이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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