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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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①

하나님 뜻으로 다시한번 일하게 하심

삼천만 온 겨레 그리스도교 복음 전파

꼼꼼한 일 처리… 김활란 박사가 신임

교파 하나돼 큰 일하게 만장일치 가결

영암교회에 정착하고 난 뒤 황광은 목사는 조용히 목회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러 다시 한번 이 땅을 위해 일해야 하게끔 했다. 1965년, 온 땅 방방곡곡에 횃불이 타올랐던 전국복음화 운동의 실무자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전국복음화 운동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펼쳐진 전국복음화 운동은 그 목표를 다음 다섯 가지 항목에다 두었다.

① 삼천만 온 겨레의 손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서를 듣게 한다.

② 삼천만 온 겨레의 손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서를 빠짐없이 갖게 한다.

③ 전국 주요 도시와 4만여 부락에 복음이 골고루 전파되게 한다.

④ 재일 교포와 북한 동포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⑤ 신자는 각각 배가운동을 한다.

원래 이 모임은 1964년 10월 16일에 고 김활란 박사의 발의에 의해 발단되었다. 서너 차례에 걸친 예비 회의 뒤 1965년 1월 5일, 제1차 중앙위원회의 모임을 서울중앙YMCA 회관에서 가졌다. 이 회합에서 사업계획과 예산안이 통과됨으로써 전국복음화 운동은 본격적인 활동 궤도에 진입했다.

위원장 홍현설 박사의 사회로 열린 그날 회의에서 실무 위원으로 다음 여섯 명을 선출했다.

총무: 김활란, 내무 및 문선위 담당위원: 김덕수, 각 분과 담당 위원: 박학래, 정인상, 모금활동 담당: 황광은, 지방조직 활동 담당: 김형도.

전국복음화 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① 이 운동은 제도적인 초교파 운동이 아니다.

② 이 운동은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고, 1965년 1년간 지속할 임시적 기구이다.

③ 이 운동은 신조나 교리에 하등 직접 관계가 없는 순수한 전도 운동이다.

④ 이 운동은 재래의 피상적 전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길 목표로 하는 전도 운동이다.

⑤ 되도록 새 시대에 적응할 새 방법을 사용한다. (예. 매스컴의 이용 등)

⑥ 본부의 지시에만 의존하지 말고 각 지부, 각 개체 교회와 교인 각자가 활발한 전도를 시행한다.

⑦ 각 교파들은 자기 교파의 특색과 강조점을 그대로 살려서 이 운동에 참여한다.

⑧ 이 운동에 헌신하는 일꾼들은 자원, 무보수 봉사를 원칙으로 한다.

⑨ 본 위원회의 모든 경비는 국내 교회들의 헌금과 교회안의 유지들의 성금으로 충당한다.

이런 취지에 의해 발족된 전국복음화 운동은 그야말로 전국적이었다. 분과위원회만 해도 연구 기획 위원회 등 열일곱 분과가 있고, 그 위원만 해도 286명이나 되는 거대한 기구였다. 그 286명 중에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급 인사 거의 전부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런 조직 속에서 황광은 목사는 실무위원회 부총무로서 총무 김활란 박사를 보좌해 일사불란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 빈틈없는 일 처리 솜씨에 감탄한 김활란 박사가 황 목사를 더욱 신임하는 것을 보고, 교계 인사들은 황 목사를 가리켜 김활란 박사의 양아들이라고들 했다. 그 말 속에는 빈정거림이나 시샘이 조금도 없었다. 그때 당시를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태규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정말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각 교파에서 모인 각계 각층의 외인부대 같은 구성원을 그는 군대 지휘관이 통솔하듯이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나갔으니까요. 황 목사 말고는 또 달리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 무렵의 일을 그의 형인 황태은 장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국복음화 운동을 초교파적인 거대한 운동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고심하던 김활란 박사와 한경직 목사 등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각 교파가 하나 되어야 할 이 어려운 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생각하다가, 이 일은 황광은 목사에게 맡겨야 한다고 만장일치고 가결되어 그 큰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실무자 황광은 목사는 교파와 배경이 다른 목사님들을 상대해 그 특유한 겸손과 진실로 이 거대한 사업이 하나로 뭉치게 했으며, 거의 침식을 잊어 버리고 이 사업에 열중했다.

신도대회 신도 선언문

그 당시 황광은 목사가 얼마나 바쁘게 일했으며, 또 막대한 소요 경비를 마련하기에 얼마나 힘썼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다음은 황 목사의 동생 황정은 장로의 증언이다.

형님은 초교파적으로 전국복음화 운동을 할 때 부총무로 일하셨다. 나는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가 오래간만에 종로에 있는 형님 사무실에 들러서 “형님, 점심이나 같이 하십시다” 했더니 “야, 점심 사줄 돈이 있으면 내게 현찰로 달라. 수많은 목사님들과 만나야 하는데 찻값이 있어야지”하시는 것이었다.

“김동수 목사님 말씀으로는 복음화 운동 본부에는 예산도 풍부하고, 총무 자리는 좋은 자리여서 예산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그 돈은 복음을 전하는 데 쓸 돈이지. 차나 마시라고 있는 돈이 아니다. 내가 만일 교제비라고 예산에서 한 푼이라도 쓴다면 아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쓸 것 아니냐?”

나는 할 수 없이 주머니를 털어 형님에게 드리고 나서,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 일하지요”하며 함께 가락국수를 사 먹었다.

전국복음화 운동 행사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조세광(趙世光) 박사 대전도회였다. 세계적인 부흥사이며 중국 기독교 영량 세계포도회(中國基督敎靈糧世界佈道會) 회장인 조세광 박사의 한국 전도 집회는 5월 4일의 김제 집회를 시발점으로 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7개 도시에서 6월 15일까지 실시되었다. 한국의 복음화 운동을 돕기 위해 내한한 조세광 박사는 5월 1일에 도착해 6월 16일 한국을 떠나기까지 45일 동안 머무르면서 풍성한 역량을 쏟아 놓았다.

중앙위원회는 그 집회를 진행시키고 집행하기 위한 자체 계획의 일부로서 집회 기구를 조직했다. 그 기구의 총무로 김활란 박사와 황광은 목사가 피선되었다. 황 목사에게 더욱더 바쁜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연인원 42만여 명이 동원된 거대한 집회는 일사불란하게 치러진 것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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