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정치와 듣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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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회에서 한 야당 국회의원이 국정연설을 위해 입장하는 대통령을 붙잡고 고성을 질러대자 경호원이 그 국회의원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끌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우리 정치에서 특별한 장면은 아니지만 필자는 우리 정치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무례한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 문제였다면, 대통령도 참고 들어주는 인내심이 부족했던 일이었다. 요컨대 두 사람 다 듣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정치란 설득과 대화를 통해서 서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가장 필요한 덕목은 듣는 마음과 말하기의 기술이 아닐까 한다.

정치인의 발언은 단지 감정 표현을 넘어서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 때 성공적으로 된다. 효과적 말하기는 오랜 연습과 숙련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다. 서양에서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말하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레토릭(수사학, 웅변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페리클레스나 시저와 같은 고대의 유명한 정치인은 모두 레토릭의 달인이었다. 현대 정치인으로 링컨과 케네디 같은 미국 대통령의 명연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정치인의 연설은 몇 마디의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달함으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가 아직도 윤핵관이니 친명이니 하는 계파정치, 패거리 정치에 머무는 근본적인 이유는 말로써 상대방을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정책대결이 아니라 상대방의 비리나 들추고 인신공격의 수준에 머무는 것도 소통능력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효과적인 말하기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듣는 마음이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발언도 마음을 닫고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을 움직일 수는 없다. 들음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들으려는 의지와 자세이다. 바로 경청(敬聽)하려는 마음이다. 상대방을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주장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질 때 경청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람은 보통 오랜 경험과 사고습관으로 굳어진 선입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상대방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선입견을 점검해보고 그 선입견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늘 배우고 자신의 식견을 넓히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마음이다. 겸손한 사람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상대방에게서 항상 무언가를 배운다. 그래서 나의 선입견에서 잘못된 점을 고치고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겸손한 사람들의 대화는 건설적으로 될 수 있다.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고 차이점을 좁혀가는 데 노력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견해가 몇 차례의 대화만으로 합의에 이를 수는 없다. 보수와 진보, 세대 간의 차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좁은 경험과 선입견을 넘어서 역지사지할 수 있는 능력은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사회과학적 통찰력에서 나온다.

겸손한 마음과 역지사지의 열린 마음으로 서로 경청할 줄 아는 정치인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정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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