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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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기도… 영육간에 강건하고 삶의 원동력

신앙은 그 분의 사랑 안에 잠잠히 안기는 것, 

주님은 따뜻하고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 

가장 안전한 피난처… 하나님의 품

수복은 됐지만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잔당 토벌 작전이 계속되던 시절, 형은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아서 때때로 공비 토벌 작전에 차출됐다. 서남지구 전투경찰들이 지리산에 숨어 있는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야간 잠복근무를 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훈련도 안받은 15세 소년이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고 야간 토벌 작전에 투입됐으니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런 위태로운 시절은 다행히 서울에 사시던 외삼촌이 우리를 보러 오시면서 끝났다. 외삼촌은 형이 그토록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우리를 서울로 데려가셨다.

나는 몰랐지만 그때 형이 공비 토벌에 차출된 것은 서모의 남동생 대신이었다고 했다. 형님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서모께서도 예수를 믿고 밤낮 성경을 읽으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여든이 넘게 사시다 아름답게 소천하셨다.

서울 영등포 신길동의 외삼촌 댁에 당도하니 외할머니께서 우리를 보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셨다. 얼굴 하얀 도련님들로 기억하던 손자들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무원이셨던 외삼촌은 하나뿐인 여동생이 남기고 간 피붙이인 우리를 극진히 대해주셨다. 우리는 외삼촌댁에 살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얼마 후 나는 중학교 1학년, 형은 중학교 3학년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이때 외삼촌댁에서 살게 된 것은 우리 형제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셨기 때문이다. 물우리에서는 교회도 불타버렸고 삶의 여유도 없어서 유년 시절 신앙생활을 못했다. 외삼촌께서는 우리 형제에게 학교보다도 먼저 교회부터 나가도록 하셨다.

“너희 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자 사역자셨다. 신앙을 지키다 돌아가신 그분들의 이름과 삶에 누가 되지 않도록 너희도 바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외삼촌은 틈날 때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격려해주셨고, 외할머니와 외숙모께서도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해주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분들의 기도가 있어서 우리 형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사히 지나왔던 것 같다. 어미를 일찍 여읜 두 외손자를 위해, 아흔이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셨던 외할머니의 그 기도를 먹고 우리 형제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나중에 외삼촌댁에서 독립해 나와 살 때도 계속됐다. 살면서 힘들거나 어려울 때 교회는 가장 편안한 피난처였다. 천지간에 나 혼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는 예배당에 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편안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는 순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게 신앙은 애걸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그 분의 사랑 안에 잠잠히 안기는 것이었다. 주님은 언제나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셨다. 몸부림치며 간구하지 않아도 들어주심을 느낄 수 있었다.

참말 하는 언어와 습관을 배우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7)

그때만 해도 서울의 중학교에는 지방 출신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입만 열면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와 놀림을 당하고 위축되어 요즘말로 ‘왕따’가 됐다. 집에 와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열심히 따라하곤 했지만 혼자서 사투리를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나를 옆에서 잘 도와주고 챙겨준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고마웠던 마음만은 잊을 수 없는 친구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를 놀리기는커녕 서울말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내가 사투리로만 알고 있는 단어를 물어보면 표준어 단어를 찾아서 뜻풀이까지 해줬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1년여 만에 사투리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투리 말씨가 남기는 했지만 내 말을 편안하게 받아넘기는 그 친구에게 용기를 얻어 다른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말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내 특징으로 삼아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더 친해지기도 했다.

그 친구가 내게 가르쳐준 가장 귀한 것은 ‘참말 하는 법’이었다. 여섯 살 즈음부터 전쟁 직전까지, 유년 시절 내내 나는 거짓말을 하도록 훈련받으며 살았다. 일제 말기 일본 순사들이 곡식 공출을 받으러 와서 창검으로 땅을 쑤시며 집안을 뒤질 때, 또는 금속 공출을 위해 유기그릇을 압수하러 왔을 때, 성과가 없다 싶으면 순사들은 집안 아이들을 불러서 숨긴 곳을 묻곤 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어른들은 늘 아이들에게 “없다고 해야 한다”, “모른다고 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아놓곤 했다.

그 뒤로도 빨치산이 매일 출몰하고 대규모 양민학살이 있었으며, 청년들은 국군으로 끌려가고, 인민군에 끌려가고, 전투경찰로 끌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애먼 사람이 죽어나갈 수 있었으므로 어른들은 아이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입단속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는 훈련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교육이었다.

“절대 이런 말 하지 마라!”, “뭐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해라!”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랐다. 부모님 이름도 누가 물으면 바른대로 대서는 안 되고, 누가 면장인지 이장인지도 모른다고 해야만 했다. 어느 집이 경찰 가족이고 어느 집이 군인 가족인지는 절대로 바른대로 말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참말을 하면 철없는 아이였다.

그랬던 내게 서울 아이들이 마음 속 생각과 아는 바를 꾸밈없이, 스스럼없이 말하는 모습은 신기했다. 멋져 보였다. 그때까지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잘 둘러대서 모면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적당히 꾸며댈 줄 아는 것이 철든 행동이라 생각했던 것을 돌아보게 됐다. ‘이제는 나도 참말을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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