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4.19와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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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 다시 하라” 사자 같은 백만학도가 전국 거리에서 외친 그날의 피의 화요일 4.19도 올해로 64돌을 맞는다. 책가방 들고 점심도 굶은 채 나도 서울거리를 뛰었다. 3.15 부정선거로 당선된 정부통령은 이승만과 이기붕이었다. ‘죽나사나 결판내자’ 선거구호를 내세웠던 민주당의 조병옥 대통령 후보는 신병차 도미하여 그해 2월 15일 갑자기 사망했다. 선거사무를 관장하는 당시 내무부 최인규 장관은 5월로 예정했던 정부통령선거를 3월로 앞당겨 실시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선거구호를 내세웠던 민주당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하여 3대 대통령은 다시 이승만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은 그 때 부통령은 장면을 뽑아 주었다. 암살위기까지 겪으며 자유당 정권 핍박을 견딘 장면은 4대 정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막강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 출마했던 이기붕은 낙선되어 실망이 컸다. 서대문 국회의원 지역구도 당시 무명의 민주당 김산 후보에 밀려 동대문 정치 폭력배 이정재가 닦아놓은 고향 이천 지역구를 빼앗아 무투표 당선하고 계속 국회의장도 유지하다가 4대 부통령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장면 부통령에게 한번 패배한 트라우마가 컸다. 이승만은 야당후보 사망으로 4선 당선이 확실했으나 자신의 부통령 당선은 믿을 수 없었다. 팔십 고개를 넘은 이승만 대통령이 별세하면 부통령인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이 컸다. 아내 이화여대 부총장 박마리아 여사도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영부인 자리에 앉는 것이 간절한 꿈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최인규 장관 중심으로 암암리에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3월 15일 선거날 정치 깡패들까지 동원해 가며 야당 선거인들을 좇아내고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투표함에 여당 투표지 40%를 미리 넣어 두었던 자유당의 목적대로 이승만 이기붕이 앞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비서실장도 지내며 이강석 장남까지 양자로 바쳤다. 도산 안창호는 거짓이 나라 망친다고 했다. 3월 15일 마산 학생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외치다 경찰총에 죽고 다쳤다. 공산당이 시킨 일이라고 학생들을 고문했다. 4월 11일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 낚시꾼의 낚싯줄에 걸려 시체가 둥둥 떠 올랐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고대생 3천 명이 4월 18일 당시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를 규탄했다. 다음날 4월 19일 전국 중고대 백만학도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외치며 결국 당시 이승만 자유당정권을 무너뜨렸다. 183명의 학생 희생자의 책임을 지고 이승만은 12년 경무대 권좌에서 물러났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는 경찰 발표를 합리화하고 부통령직에 연연하던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일선 사단장을 찾아가 피신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이승만이 하야한 뒤 4월 28일 경무대 관사로 와서 당시 육군본부 의장대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의 권총에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연세 상대 1학년 차남 이강훈이 사살되고 이강석 자신도 자살했다. 

한때 서대문 이기붕집은 제2경무대로 많은 아부 정치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김두환 의원은 박마리아에게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고 공격하는 말을 했다. 이기붕 일가의 집단 자살행위는 거짓정치 말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오늘의 정치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외무장관 허정을 내각수반으로 4.19 혁명 뒤의 수습을 맡기고 독재자로 비판받던 이승만은 그해 5월 29일 프란체스카 영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라의 부정 부패를 규탄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살린 4.19 혁명정신은 우리 헌법전문에 빛나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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