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위대한 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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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허번 박사를 섬기면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특히 이동진료와 무의촌 선교에 대한 마음 자세와 헌신은 그에게 모두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골로 이동진료를 나갔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의사가 없는 시골이 많았다. 그는 가는 도중에도 차 안에서 계속 전도지를 뿌렸다. 나는 그로부터 의사로서의 봉사 정신뿐 아니라 전도의 열정도 배웠다. 그는 의사이기 전에 열정어린 전도자였다.

비가 많이 와서 이동진료를 가지 못하게 되는 날은 비옷을 입고서라도 전도지를 들고 광주 시내나 변두리로 나가 축호전도를 하셨다. 그런데 동료 외국인 선교사들 가운데는 그의 전도 방식을 비웃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전도가 되겠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훗날 어떤 청년이 광주에서 의사가 뿌려놓은 전도지를 보고 예수를 믿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길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 시골의 낙후된 형편은 현대의 동남아시아 오지 못지않게 열악했다. 다만 그때가 네팔의 지금보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전라남도 지역은 평지가 많아 웬만한 곳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허번 선교사가 주말에 이동진료를 다닐 때마다 다른 한국인의사도 동행했지만, 나는 광주에 갈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그를 따라다녔다. 하루는 자동차로 목적지 근처까지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끊어져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약품과 의료 장비를 손으로 들거나 지게에 지고 가야만 했다. 당시 의사가 입던 가운은 요즘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일반 양복에 가까운 모양이라 불편했고, 그런 차림으로 짐까지 들고 진흙탕을 걸어간다는 게 나로서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고허번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앞서 갔고, 진료 현장에서도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무척 검소했다. 그에겐 번듯한 옷 한 벌이 없었다. 늘 나일론으로 만든 셔츠에 노타이 차림으로 다녔는데, 무슨 기념일을 맞이해 병원에서 양복을 해드려도 다음 날이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벗어주었다. 고 선교사 댁에는 세숫비누도 없어 사모님이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선교비로 받은 돈을 거의 다 결핵 환자를 위해 써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녀들에게는 신문팔이를 시켰다. 돈이 없이서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가난한 아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던 자녀들이 이웃집에 말려 놓은 보리밥을 먹다가 도둑으로 몰려 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충성스럽고 정직했으며 성실하고 열심이 많은 선교사였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아침 6시에 회진을 돌았는데 고허번 선교사는 선교사 묘지에서 혼자 새벽기도를 하고 5시면 병원에 출근하여 간호사와 함께 혼자 회진을 마치곤 했다.

1970년대 말, 고허번 선교사는 발전한 한국에서 계속 일하는 것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더 어려운 나라로 간다며 방글라데시로 가셨다. 내가 선교사가 되어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닌 것도, 고 선교사에게서 받은 영향이 있다. 그는 방글라데시 통기 지역에 진료소를 세웠는데, 훗날 내가 그 진료소에서 사역하게 되었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고허번 선교사는 통기 진료소를 세운 다음 방글라데시에서도 더 어려운 지역에 ‘1타카 클리닉’이라는 병원을 세우고 그곳으로 옮기셨다. ‘타카’는 방글라데시 화폐 단위로, 1타카 클리닉은 쉽게 말해 아주 값싼 치료비를 받는 병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연로했지만 말년에도 3개월은 선교지에서, 3개월은 본국에서 지내시다가 2003년 7월 암 투병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종종 씰과 커딩턴 같은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선교사로서 이것으로 충분한가?’ 하며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신앙의 선배들은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선교지의 생명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스승들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셔서, 내게 힘과 건강을 계속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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