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목포의 의료 선교사들이 이끈 복음과 치유의 역사
미국 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미국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축비가 군산 선교부에 도착하자 구암 언덕 높은 대지 위에 새 건물을 짓고 한국식 온돌방을 꾸며 그곳에 환자들을 입원시키고 진료했다. 패터슨 의료 선교사는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 다니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아끼지 아니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수술 받느라고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병은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감동한 환자들은 그 고통스러웠던 병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총이 어느덧 자신이 누워 있는 온돌방에 따뜻하게 비추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운 태양열이 자신의 환부에 와 닿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태양열이 균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이 무렵 뜻하지 않게 평양에서 개업의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던 계원식 의사가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했다는 정보를 듣고 일본 고등계 형사가 수도 없이 평양의 기성의원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때 군산 예수병원 치과에서 조수로 근무했던 윤씨라는 젊은 청년의 조언을 듣고 계원식 원장은 군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원장님, 군산 예수병원에 가면 원장님은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일본 형사들의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장 계원식은 단숨에 결정을 내리고 꿈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전라도 땅 군산으로 향했다. 계원식은 평양 출신 계택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이기도 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평양에 기성의원을 개원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좋은 학교를 졸업했다 해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 돈을 모으기는 했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군 군자금 문제로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군산 예수병원에 와 보니 별천지 같았다. 그는 군산 구암에 머물면서 매주 토요일에는 농어촌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군산선교부 관할인 익산군 황등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는 익산 솜리에서 황등으로 이어지는 들녘의 그 넓은 평야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 꼭 갈릴리 바다 같구나. 여기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기를 잡으면 더 이상 멋진 낭만이 없겠구나.”
이 말을 듣고 있던 한국인 조수들은 계원식 의사의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그는 군산 구암으로 돌아가서 황등으로 이사할 것을 결심하고 패터슨 선교사에게 사표를 내고 황등으로 옮겼다. 때마침 황등에는 동련리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황등시장터에 기성의원 간판을 내걸고 의료에 진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장날이 되면 장터에 나가 전도를 했으며, 반응이 좋자 곧 자신의 병원 기성의원 방 한 칸을 내어 그곳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기도회를 가졌다.
이 일로 황등 기성의원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그는 1928년 황등교회를 설립하고 그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평양에서 내려온 그의 아들 계일승, 계이승은 이로 인해 모두 다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
계일승은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정칙외국어학교를 마친 후 곧 중국 북경에 있는 연경대학에 입학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평양신학교에 진학했으며, 그후 그는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이리중앙교회, 황등교회에서 시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원래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추천으로 미국에 유학을 해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곧 귀국하려고 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연합국 군사사령부의 고문으로 있다가 안정이 되자 귀국해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또는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호남에 대한 애착 때문에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군산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복을 잘못 먹은 환자들이 많았다. 그때 군산 예수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환자들은 억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패터슨 선교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1926년 부인 로제타와 함께 가족을 이끌고 고향 오하이오로 돌아갔다. 그의 병은 미국의 의술로도 고치지 못하고 결국 1933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 전까지는 참으로 큰 희망을 갖고 의학부에 진학했다. 1900년 우스터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의술을 연마한 후 1907년 내과 전문의로 면허를 취득했다. 잠시 레지던트 코스를 이수하고 한국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단독으로 군산에 발을 내딛었다.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동기 동창생인 로제타를 만나 1911년 결혼을 했으며, 로제타는 그 길로 군산에 와서 부녀자를 중심한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과로로 더 이상 군산에 머물지 못하고 함께 한국을 떠났다.
군산 예수병원에 의사가 없게 되자 목포에서 활동하던 호리스 터가 군산으로 부임했으나 그도 역시 1936년 군산을 떠났다. 그 후 남장로교 선교 본부에서는 병원을 정리할 겸 의사인 윌슨(Dr. James Stevenson Wilson)을 잠시 파견했으나, 일제 말엽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이 병원은 자동적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해방이 되었지만 재건하지 못하고 구암에 있는 예수병원은 끝내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목포 프렌치병원과 선교사들
목포 개항을 앞두고 일본 사람들은 수없이 드나들면서 좋은 땅을 다 매입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과 전주에 머물고 있었기에 목포가 개항된다는 정보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 개항하는 목포에 선교 기지를 마련하는 것은 선교에 좋은 장소가 되겠다는 생각에 배유지 선교사와 이눌서 선교사 등 여러 사람들이 부지런히 목포를 왕래하면서 양동에 선교사촌을 형성했다. 일찍이 목포선교부 책임을 맡았던 배유지 선교사는 오원 의료 선교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되었다. 이후 목포는 일본 사람들이 진을 치면서 입국하고 있었으며, 이에 뒤질세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도 오원 의료 선교사를 대기시켰다가 그 다음해인 1898년 가을에 목포로 파송했다. 오원 선교사는 목포 양동에 자리를 잡고 임시로 배유지 선교사의 집 사랑채에 목포진료소란 간판을 걸고 진료에 임했다. 그는 목포진료소가 개원된지 얼마 안 된 1899년 7월 21일에 선교잡지에 이런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최근 이곳에 문을 연 목포진료소는 이미 한국의 일부 고난받는 자들을 섬기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진료를 통해서 많은 생명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더없는 큰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료소 밖에서는 진찰을 기다리는 많은 환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성경을 펴들고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읽게 했으며,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면서 읽게도 했다. 개중에는 큰 소리를 내어서 읽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밖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대기표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대기표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을 써 놓고 읽게 하기도 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