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을 왔던 북한 김일성 치하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1942-2025)는 31명 중 유일한 귀순 생존자였다(국방부 기록 생포).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의 군사정부가 경제면에서 북한을 앞지르자 김일성은 대한민국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암살계획을 세웠다. 북한 민족보위성 총괄본부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에 그 명령을 내렸다. 20-30대 청년 유격대 31명이 17일 휴전선을 넘고 18일 미군 2사단지역 철조망도 뚫었다. 19일 파주군 삼봉산에서 나무꾼 두 사람을 만났다. 죽일까? 토의 끝에 나무에 묶어놓고 예정코스로 달렸다.
다음날 새벽 조깅을 하던 김성열(현 작가)를 붙잡고 “너 군대 갔다 왔느냐?” 물을 때 갑자기 반벙어리 바보짓을 했다고 한다(본인증언). 노상에서 만난 김성열 청년을 살려준 124군부대는 인왕산에서 밤을 새고 아침에 서울 지리를 망원경으로 봤다.
21일 밤 10시경 하산 청와대 습격에 나섰다. 파주 두 나무꾼의 신고를 받고 비상경계 잠복 근무를 하던 경찰들이 군인복장의 북한124군 길을 막았다. 기관이다! 말하는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124군 동태를 살핀 경찰이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에게 보고했다. 그때 마침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대화 중에 있던 최 총경은 빨리 가보라는 박 대통령 명령을 받으며 지프차로 세검정 고개에서 124군부대를 만났다. 어느 군대 소속이냐? 신분을 밝혀라! 소리 지르자 “세게 나오네”하더니 금방 지프차 앞좌석에 앉은 최총경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최 총경은 쓰러지면서 “청와대를 지켜라” 외치며 순직했다. 7명이 살상당했다. 청운중학교 근처에서 군경과 대치하던 124군부대는 도망가며 달리는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여럿이 죽고 다쳤다. 그 무렵 자폭하지 않고 손들고 귀순한 124군 유격대 하나가 김신조였다.
김신조는 기자 질문에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수다. 청와대 박정희 멱 따러 왔수다’라는 말로 살벌하게 대답했다. 제6군단에 도망가는 124군부대를 추격해 28명을 사살했다. 이름과 신원을 김신조가 일일이 밝혀 주었다. 1명 귀순 2명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 청진 출신 김신조는 귀순 후 최정희 성도와 결혼해 김성환 김남희 남매를 두었다. 서울침례신학교 졸업 후 성락 삼봉교회, 성락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학사이기도 했다. 한국 반공교육 강사로 많이 활동했다.
바보짓 때문에 김신조 부대가 살려준 청년 김성열 작가가 초청해 교회 장로 하나와 동행해 서울 강서구 우장산역 근처 음식점에 강서문인 몇사람과 김신조는 친목 대화를 가졌다. 성품이 좋았다. 대한민국에 귀순 후 북한 부모형제는 다 처형되고 일체 소식도 모른다고 했다. 5.16 군사정변 때 박정희 당시 장군은 혁명공약 제1조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내세웠다.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 야욕은 철저한 반공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한미군사동맹강화, 산업화, 공업화 되어가는 남한에 박정희 암살 제거가 상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한에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대통령 관저를 폭파하며 요인을 암살하고 주한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간첩수용소를 폭파해 북한간첩을 대동하고 월북하는 것이 124군부대 1968년 1.21사태를 야기시킨 목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튼튼히 국방력을 강화하고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조직했다. 전방 155마일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정부정책기조도 경제개발, 자주국방 강화였다.
올해 2025년 4월 9일 82세로 별세한 김신조 목사에게 우리 애도를 표하자.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