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일제시대 “한글이 목숨이다” 신념 밝힌 외솔 최현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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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울산에서 태어나신 애국지사 한글학자 교육자 사상가이다. 어려서 8년간 한문공부 하시고 14살부터 3년간 일신소학교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0년 4월 현재 경기중고교인 한성고등보통학교 학생 75명 모집에 1천200명 수험생 가운데 최우수 수석합격했다.

입학한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어 비분강개한 애국심을 일기에 적어 두었다.

학교 이름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어 일본 학교가 되었다. 실망스런 학교 교육보다 고종형 박필주와 그 친구 김두봉 권유로 주시경(1976-1914) 스승을 만나 남대문 상동교회 청산학원 부설 조선어 강습원에서 우리말 우리글 우리얼 사랑의 국어공부가 더 뜻 깊고 좋았다. 고등과 33인중 수석졸업했다. 1908년 8월 31일 신촌 봉원사에서 한글학회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제자들과 주시경 선생이 만들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장학생으로 일본 히로시마 사범학교로 진학 졸업하고 다시 일본 교토제대 철학과 대학원까지 진학하고 그 무렵 우리 민족이 다시 살아갈 길을 밝히는 ‘조선민족 갱생의 도’라는 저서를 냈다.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1930년 단행본으로 출판했으나 일제는 판매 금지시켰다. 외솔은 어느 음식점 방명록에 “한글은 목숨이다”로 썼다. 그리고 한국 국문법의 경전이 되는 불후의 명저 ‘우리말본1935’를 간행했다. 흥업구락부 애국단체사건에 연루되어 연희전문 교수직을 잃었을 때 3년간 영원한 명저 ‘한글갈’을 썼다. 조선어사전편찬을 트집 잡은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33인을 기소하고 함흥감옥에 옥살이를 시켰다. 이윤재 한징 두 선생은 옥사하고 외솔은 3년 언도를 받았다. 옥중에서도 한글가로쓰기, 풀어쓰기 연구에 몰두하고 ‘임생각’ ‘나날의 살이’등 9수의 옥중시조도 남겼다. 지옥같던 함흥감옥에서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국정부 6.25 무렵 문교부 편수국장 두 번에 걸쳐 가로쓰기 한글교과서를 편찬해 밝은 미래 한글세대 국어교육에 한글사랑 나라사랑 기초를 반석같이 이루었다.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제자 허웅 교수를 비롯해 시인 이은상, 한글학자 한갑수 등과 국한혼용패들의 극심한 한글전용반대도 강력하게 물리쳤다. ‘나라사랑의 길’ 저서에서 청년들에게 영리한 꾀배기가 되지 말고 좀 양보하고 손해볼 줄 아는 어리배기가 되라했다. 희생으로 자기 불빛을 밝히는 촛불같은 존재가 되라했다. 학교문법 제정을 문교부가 할 때 최현배문법에 잡음씨 ‘지정사’가 빠졌을 때 해병대 제대하고 찾아간 내게 외솔 선생은 “오군 진리가 다수결로 결정될 수 있는가? 동쪽에서 뜨는 아침해를 서쪽에서 뜨라고 다수결로 정할 수 있겠는가?” 하시며 퍽 언짢아했다. 1970년 3월 23일 새벽 3시 35분에 돌아가시며 장남 최영해에게 남긴 유언은 “한글을…”이었다. 숨질 때까지 외솔은 한글을 사랑하셨다.

나라는 사회장으로 모시게 해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한글학회 산소에 모셨다. 같은해 4월에 부인 이장연 여사도 돌아가셔서 외솔 산소 옆에 안장했다. 2009년 7월 23일 대전현충원 제4애국지사묘역 144호 묘소로 옮겨 모셨다. 나라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70년 3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이 드렸다. 1970년 5월 장충단공원에 외솔 최현배선생기념비가 은혜롭게 서 있다. 이 해 추모단체 외솔회가 조직되고 홍이섭 연세대 교수가 초대회장 맡으시고 회원도 3천 명이 넘었다. 외솔상 시상식도 올해 10월 24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제47회가 진행되었다. 외솔은 얼말글은 하나요 거짓의 온상은 돈이라 하셨다. 1957년도에 홍릉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도 만드시고 업적도 크게 남기셨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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