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선 교회, 중앙교회”
정동 밖 첫 복음의 터전, 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
중앙교회(하나로빌딩)
앞에서 찾아보았던 가우처기념예배당은 현재의 중앙교회가 사용하던 건물이고, 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기 전에 사용하던 이름은 종로교회였다. 종로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정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가 처음으로 정동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해서 세운 최초의 교회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우처기념예배당은 종로교회가 시작된 곳이라는 장소적인 의미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향정동 집에서 시작한 종로교회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여전히 낯선 이방인들이었고, 게다가 개종을 해야 한다는 것에 사회적 분위기가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정동 집에서의 예배는 사실상 어렵게 되었을 때 길 건너의 대동서시(大東書市)로 옮겨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궁여지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사실상 종로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그러던 차에 대동서시를 책임지고 있었던 최병헌이 정동교회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면서 종로교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따라서 종로교회는 정동교회로 편입되었으며 그 역사도 단절되고 말았다.
종로교회가 다시 부활한 것은 1910년의 일이다. 즉 그해 이경직 목사가 종로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면서 교회를 재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로서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18년 종로교회는 부설 중앙유치원을 설립했다. 유치원을 개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1922년에는 유치원 사범과를 설립해서 운영하면서 중앙보육학교로 발전시켰고, 이것이 현재의 중앙대학교의 모체가 되었으니, 중앙대학교가 이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유치원 교육은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부설 유치원과 보육학교를 만들어서 유아교육과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하는 일은 교회를 넘어서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이 교회의 전도사였던 박희도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제에 의한 박해를 받았다.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평양의 숭실학교와 감리교회 협성신학교를 각각 중퇴했다. 잠시 전도사로서의 사역도 했지만 중앙교회에서의 사역은 유치원 원감이었다. 비록 학교를 중퇴했지만 당시로서는 신지식인으로서 시대적인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기에 3·1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로서 참여하게 되었고, 거사를 치른 후 바로 체포되어 2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와 함께 이 교회의 김창준 목사도 민족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해방 이후 이념적인 문제로 월북함으로써 그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현 중앙교회는 종로교회의 역사를 계승하는 교회로서 여러 가지 역사적 유산을 기억하게 한다. 즉 대동서시를 열었을 때 최병헌이 살았던 곳이고, 그곳은 동시에 대한성서공회가 탄생한 곳이며, 1903년 YMCA(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된 직후 회관이 없는 관계로 향정동 집으로 일컬어지는 중앙교회의 출발지인 집에서 1909년 회관이 마련될 때까지 모임을 가졌음으로 사실상 YMCA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중앙유치원과 보육학교를 시작함으로써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었고, 그것이 모체가 되어서 현재의 중앙대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그 실체가 없어졌지만 협성여자신학교가 이곳에서 여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을 하다가 1920년에 충정로로 이전해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감리교회의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요람이기도 하다.

1930년 그동안 사용해오던 교회 이름을 종로교회에서 중앙교회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감리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복흥파와 호헌파로 나뉘어 다툴 때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이기도 했다. 또한 6·25사변 당시에는 인민군 환영예배가 드려진 곳으로서 민족수난의 현장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로라고 하는 지리적 위치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목도한 교회라고도 할 수 있다. 가우처기념예배당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1975년이고, 그 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건축하는 과정을 거쳐 건축이 마무리된 해에 입주해 현재까지 빌딩을 지어 그 안에 위층을 예배당과 부속시설로 사용하고 아래층들은 임대하고 있다. 지난 해(2015년)에는 가우처기념예배당으로 헌당을 했고, 아울러 설립 125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리면서 가우처의 흉상도 만들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