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함성이 깃든 곳, 태화관의 시간
독립선언의 현장, 태화관 터 — 1919년의 외침이 잠든 인사동 골목에서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①
현재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하 태화관)은 강남으로 옮긴 상태다. 하지만 태화관이 있었던 곳은 중앙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주변이다. 이곳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시발한 곳으로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 태화관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그 역사적인 장소만큼은 기억해두고 싶은 마음이 더한다.
그렇지만 그 흔적조차 찾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딱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그나마 <3·1독립선언유적지>라고 하는 새김돌을 세워놓은 것이 있어서 위로를 받게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을 지나친다면 이곳이 어떤 곳이었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또한 자명하다.
태화관은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과 절규를 모두 품은 곳이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아픈 사연을 느끼게 하는 역사를 태화관 스스로 가지고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태화관의 역사는 오래다. 이 건물을 처음 소유한 사람은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낭선 부원군, 1456~1542)이 연못과 정원을 만들고 후원에 태화정(太華亭)을 짓고 즐긴 것이 태화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 집 주인도 바뀌는 법이기에 임진왜란 후에는 인조 임금이 능양군 시절에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안동 김씨가 정치적 실세를 과시하게 되면서 김순조의 조카 김흥근(1796~1870)이 이곳에 살았다. 대원군이 집권한 다음에 이 집주인은 헌종 임금의 후궁인 순화궁 김씨가 살다가 1908년 그녀가 서대문 밖 미동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궁내부 대신인 이윤용(이완용의 형)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11년부터는 이완용이 이 집의 주인이 되어서 살았다. 1910년 한일병탄이 강제로 체결된 이듬해에 이 집을 차지한 이완용은 이 집에서 더 오래살기가 힘들었다. 그를 향한 위협이 상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1913년 인왕산 자락 옥인동에 양옥으로 저택을 지어 이사를 했다.
그 후 한동안 이 집은 주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 명월관이라고 하는 요릿집이 불이 나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명월관 사장은 이완용에게 이 건물을 임대해서 요릿집을 계속하게 되었다. 명월관이 이 건물을 빌려서 영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후원에 있던 태화정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태화관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그 건물에서 3·1독립만세운동의 거사가 전격적으로 치러지게 되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독립선언서는 본래 탑골공원에서 선언식과 함께 낭독될 계획이었으나 폭력시위를 염려해서 손병희 선생이 자신의 단골인 태화관에 연락했는데 태화관 측에서는 별유천지 6호실(태화관 별실)을 준비해주었다.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 태화관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드는 현장이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건물이 이완용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의 주역으로 친일인사의 대부인 그의 집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삼창을 했으니 그의 입장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이 사건으로 총독부의 관리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반면에 태화관을 빌려서 영업을 하던 명월관은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독립만세운동의 여세는 거세게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완용은 이 집을 매물로 내놓게 되었다. 하지만 대지가 무려 3천 평이나 되고 16채의 기와집으로 구성된 것이라 작은 궁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으니 쉽사리 작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그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은 미국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였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여선교부는 여자관(女子館)을 세워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복지사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종로교회(가우처예배당) 근처에 태화관이 매물로 나오니 여선교부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서 어떻게 해서든지 건물을 확보하려고 했다. 서울 지역 여성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마이어즈(M. D. Myers)가 이완용 측과 흥정 끝에 1920년 12월 11일 당시 돈 20만 원에 매입을 하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태화관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