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1893-?)는 학문적으로는 한문학자요 사학자이다. 사상적으로 지사요 문학적으로는 시조작가이다. 일제시대 변절없는 지조와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 산 것은 반골사상의 조부 영향과 두 외숙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본다.
2대 독자 위당은 생모 양모 어머니가 두 분이시다. 위당의 담원시조집에 발표된 한국최초 서사시조 자모사 40수(오동춘 위당시조연구 박사논문에 의함) 머리말에서 “생어머니는 높고 어머니는 크다”로 두 어머니의 사상과 인품에 대해 언급했다. 두 어머니는 ‘참’교육과 ‘대의(大義)’교육을 잘 시켰다.
위당은 위당시조집 글에서 양모에게 우리말 우리글 사랑을 잘 배웠다고 술회했다. 담원시조 25편의 시조에서 위당은 우리 토박이말을 시어로 가려쓰고 옛말도 찾아 시조를 창작했다. 시조집에 위당시조를 평가한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이나 자칭 국보를 내세운 양주동 박사도 우리말 시어 선택이 알차고 순수하고 소박하게 인물이나 자연소재의 위당시조가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1920년대 외솔 최현배와 함께 연희전문 교수를 역임하며 세종과 한글사랑 정신을 더욱 굳게 가졌다.
위당은 1911-1912년도에 상해 안동에 동제사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갈 때 대구서씨 생모를 모셨다. 압록강을 건너며 생모는 이 강이 어느 강이냐고 물으셨다. 그 서사체험이 자모사(慈母思) 37번 시조에 위당이 아래와 같이 읊었다.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이라 여짜오니/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흘러라”//나라가 일제 강탈로 망한 것을 아시는 생모 어머니의 우국지심이 잘 드러난 것이다. 위당은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동제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1923년도에 연희전문 교수가 되어 이화여전 중앙불교전문 등의 학교 강단에서 민족정기와 항일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일본 총독부 정치를 비판했다. 연희전문 강의 가는 길에 뒹구는 낙엽을 보고 생모 양모 생각이 나서 서사 시조 <1>번 첫수를 읊었다. “가을은 그가을이 바람불고 잎드는데/가신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살뜰이 기르신 아해 옷품 준 줄 아소서//” ‘잎드는데’는 옛말을 살려 떨어지는데로 풀이된다.
‘가신님’은 생모 양모를 그리워 하는 시어이다. 살뜰히 키워준 두 어머니 그리움에 살도 말라간다는 미적 정서가 모자지간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다. 18세에 난곡 이건방을 스승삼아 양명학을 공부한 강화학파 마지막 학자이다.
일제가 요구한 글이나 강연은 다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제자 윤석오 이리 농장에 가 피신하다 광복을 맞았다. 초대 감찰위원장을 맡았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찍 사임하고 국학대학을 세웠다. 1950년 7월 납치되어 11월 국군포격을 피해 신의주로 끌려가다 별세하신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늦게나마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위당은 1935년도부터 5년간 동아일보에 ‘조선의 얼’을 연재해 민족사관을 확립한 사학자이다.
1980년대에 연세대 교정에 위당관을 세우고 그 건물 앞에 흉상의 동상이 서 있다. 맏딸 정정완은 전통 바느질 문화보유자다.
생모 양모의 높고 큰 대의의 두 어머니 일생과 자식사랑 나라사랑을 윤선도 어부사 40수처럼 자모사 40수를 서사시조로 남겨 시조단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위당 정인보는 암울한 일제시대 지조를 지킨 애국자요 우리 겨레의 스승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