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일화 가운데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는 한 마디는 후대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1597년 1월 12일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선조는 일본군 재상륙을 막으라는 명령을 이순신이 따르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어 2월 6일에 해임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은 2월 26일 가덕도에 도착한 원균에게 수군을 인계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원균은 3월 기문포 해전, 6월 가덕도 해전에서 졸전을 벌이다가 7월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전을 했다. 판옥선 170여 척 가운데 절반은 흩어지고 절반은 침몰했다. 거북선 3척도 함께 침몰했다. 8월이 되자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을 시작했다. 곡창지대를 차지한 뒤 해로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대비해서 조선군도 강화도 방어에 착수했다.
이순신은 4월 1일에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명령을 받았다.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머물던 이순신은 7월 23일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했다. 8월 15일에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는 유명한 장계를 올리고 수군을 폐지하지 않았다. 8월 18일에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은 이순신은 9월 16일에 명량해전에서 일본군 133척과 맞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명량해전 승전은 두 차례 왜란에 결정적 전기였다. 1598년 9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군을 시작했다. 11월 19일 노량해전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섬멸한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판옥선 60척, 연락선 100척의 함대를 편성한 조선 수군은 300척 규모의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서 일본 배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신은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다. 요즘으로 치면 해군 참모총장에서 육군 일등병으로 강등당했다가 복직해서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소수의 수군을 이끌고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구했다.
조영태와 고우림은 공저 <인구와 부>를 통해서 저출산 고령화 인구 문제를 전략적으로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두 저자는 인구를 살아있는 구조로 이해하고 인문학의 지평에서 인구학을 연구했다. 정확한 인구 예측에 치중하지 않고 인구 변화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했다. 한국 기업들의 경제활동과 관련해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인구 구조도 연구했다. 세계적인 맥락에서 인구 변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다.
두 저자가 저술에 담은 세 가지 물음도 인상적이다. 인구를 ‘감소’의 문제로 보지 않고 ‘변화’의 과정으로 볼 때 무엇이 달라질까? 숫자 속에 담긴 사람의 삶과 움직임을 읽고 데이터에 숨을 불어 넣으면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나? 인구의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두 저자는 자신들의 저서가 인구라는 주제를 가진 인문학 서적이 되기를 희망했다. 덕분에 ‘정확한 예측’에 집중하던 인구학 연구가 ‘지혜로운 대응’으로 지평이 넓어졌다. 조영태 교수는 기왕의 인구학 연구로 기여한 바가 크지만, 덕분에 한국사회 인구 위기 대응의 폭이 크게 확장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 교세 감소도 배 12척만 남은 절대 절명의 위기는 아니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다가올 미래 변화를 점검하고 치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