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장수출신 주논개 충절정신 잘 이어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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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출신 주논개(1574-1593)는 충효열 삼강지도를 잘 실천한 순국여인이다.

일본 풍신수길이 일으킨 임진왜란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여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해 열손가락에 반지를 낀채 건장한 왜장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순국했다. 거룩한 순국이다. 이 죽음을 찬양한 변영노(1897-1961) 작 ‘논개’ 시비가 진주 촉석루 앞과 장수 논개고을 의암사 경내에 세워져 논개의 빛삶을 보여주고 있다. 1593년 10월 김시민(1554-1593) 장군이 이끈 1차 진주성 전투는 3천여 명 군사로 왜군 3만여 명을 무찔러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대첩이 조선조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그런데 북진시 패배한 진주성 공격을 2차로 1593년 6월에 왜군이 시도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군관민 7천여 명과 몰려온 왜군 10만 명과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군은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전사한 김시민 장군을 위시해 용감무쌍하게 전투 지휘에 앞장 섰던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세 장군은 남강에 투신자살해 조선장군의 장렬한 순국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뒤를 이어 최경회 장군의 젊은 아내 주논개도 왜장 하나를 남강 물귀신으로 만든 것이다.

신안 주씨 양반가의 주달문은 아내 밀양 박씨가 낳은 외동딸 주논개를 맞았다. 특이하게도 출생 사주가 4갑술이었다. 갑술해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모두 갑술 통일 4주였다.

놓은(낳은 사투리) 개였다. 그래서 이름을 논개(論介)라 지었다. 총명하고 영리한 주(朱)논개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주달무 삼촌댁에 어머니와 함께 의탁해 살았다.

노름 빚이 많은 삼촌은 이웃마을 김풍헌에게 조카딸 주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았다.

이를 알게 된 모녀는 논개 외가에 가 살았다. 김풍헌 제소로 장수현감 최경회 앞에 논개 모녀가 잡혀왔다. 죄는 삼촌 주달무에게 있음을 알아차린 최경회 현감은 모녀를 무죄 석방시켰다. 기거할 곳이 없음을 알고 관청에서 심부름하며 논개 모녀가 살게 했다. 최경회 현감이 담양군수로 부임해 갈 때 17세 논개와 부부의 예를 올렸다. 화순 고향에서 어머니상을 맞은 최경회는 논개를 장수로 보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경회가 의병장이 되어 다시 장수에서 의병을 모집해 훈련시킬 때 주논개는 그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 남편 최경회를 도왔다.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호남 영남 지역 왜군을 물리치며 왜군들의 사기를 꺾어 놓았기에 제1차 진주성 승리의 대첩을 이룰 수 있었다. 

그간 의병활동 공로가 컸던 최경회는 195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논개가 어렵게 진주로 가서 반갑게 남편 최경회를 만났으나 잠깐이었고 제2차 왜군의 진주성 공격으로 남편 최경회를 잃었다. 주논개는 삼강오륜 중에 충효열 삼강지도를 힘껏 발휘해 당시 조선의 원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남편 잃은 분노로 육척장신의 왜장 모곡촌육조를 남강에 수장시켰다. 최경회와 주논개의 가묘가 경남 함양군 서상면 한 산언덕에 모셔져 있다. 장수에서는 논개를 논개님으로 부르고 역사에 잘못 기록된 의가(義妓)가 아니고 당당한 최경회의 후처 아내였음을 내세운다. 주논개기 태어난 장수 장계면 주촌마을 생가터에는 수몰되어 현재 새로 조성된 주논개 생가터에 살던 옛집 모습이 복원되고 주논개 모습이 동상으로 충절정신 모범여성 대표로 우뚝 서 있다. 애국지사 위당 정인보시조집에도 주논개 충절찬양 시조 한수가 담겨 있다. 끝으로 1920년대 폐허동인 출신 시인 변영로의 논개 시 제2연만 소개해 우리가 논개 충절정신을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란다.

아립답던 그 아미(蛾媚)/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논개에게 목숨 잃은 왜장 게야무라는 전사 아닌 일개 여자 손에 죽었다 해 일본 역사에 기록도 없다고 한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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