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자식들 부모임종 다 참여하기 어렵다

Google+ LinkedIn Katalk +

사람은 나면 죽는다. 자기 죽음의 종착역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에 이른 죽음은 복된 죽음이다. 부모님 숨지는 임종시에 자식들이 다 참여하기 어렵다. 자식이 외국이나 먼 곳에 있을 때나 부모 곁에 있다가도 화장실 간 사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다. 임종불참의 불효를 면할 수 없다. 내 경우는 1975년 여름에 아버지께서 고교체력장 검정요원으로 내가 출타 중일 때 66세로 돌아가셨다. 맏며느리 아내 혼자서 임종했다. 임종도 못한 나는 배운 아들이라고 농부 노동자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았다. 병고 중에 간호도 제대로 못해 드렸다. 효녀 심청의 만분지 일이라도 효도했으면 오늘도 가슴 찢기는 불효죄를 앓지 않을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5번을 지키지 못한 불효막심한 아들이다. 송강 정철(1535-1593)의 훈민가 1수 시조에 불효는 “평생 고쳐 못할 일”이라는 말이 가슴 깊이 절실했다. “돈은 똥보다 더럽다. 개도 안 먹는다” “새끼 서발은 쓸데 있어도 인간백발은 쓸데가 없다”라고 평소에 말씀하신 아버지 말씀은 가슴에 새기고 산다. 

강서구 화곡동의 요양병원에서 88세로 1907년도에 별세하신 어머님은 그때 다 모인 5남매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 한글을 해독하신 어머님은 성경책을 애독해 읽으시고 자식들 위해 기도도 많이 해 주셨다. 하씨 어머님은 하가 집안 뼈대를 존중하며 자식들에게 “너희는 뼈 있게 살거라” “형제 우애 있게 살거라” 훈계하시며 “자식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말씀하셨다. 어머님의 투철한 교육정신에 따라 나는 대학의 석·박사 학위취득의 교육자가 된 것으로 믿고 하나님과 어머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나는 정암 박윤선(1905-1988) 목사님 고려신학교 교장의 수제자로서 강서구 화성교회(1967)를 개척하신 평암 장경재(1918-2001) 목사님의 임종을 했다. 

담도암으로 3개월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 중일 때 2001년 3월 2일에 나는 화성교회 김기영 담임목사님과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임종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다. 차인환 장로가 오면 임종예배 드리려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공중을 향해 두눈을 크게 뜨고 누워 계신 병원 침대 곁에 가서 “장경재 목사님 오동춘 장로 왔습니다” 큰 소리로 말씀 드리자 고정되어 있던 장경재 목사님 두 눈동자가 껌벅껌벅 움직였다. 장경재 목사님 아직 의식 있으니 김기영 담임목사님 빨리 기도하시라 했다. 기도 후에 나도 큰 목소리로 기도드렸다. 임종예배 드리려 할 때 주치의사가 들어와 장 목사님은 저녁 8시 10분에 하늘나라 가셨다고 말했다. 강정채 사모님은 예배 중에 소천하시길 바랐는데 목사, 장로 기도 중에 소천하셨으니 장 목사님은 은혜롭게 하늘나라 가셨겠다고 했다. 임종예배를 드렸다. 장 목사님 임종에 참여한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

김기영 담임목사, 임연희 부목사, 오동춘 장로, 강정채 사모, 미국에서 건너와 시아버지 장 목사 병간호에 헌신한 김태복 권사(맏며느리), 막내 며느리 이은경 집사, 막내아들 장덕형 집사, 딸 장승은 어린이가 장경재 목사님 임종에 참여했다. 아들 다섯 중에 하나도 아버지 장 목사님 임종 참여를 못했다. 장남 삼남은 미국에서 오느라 불참되고 국내 사는 세 아들도 다 아버지 임종 참여가 어려웠다. 나는 합신교단 70회 총회장,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재단이사장 장경재 목사님 별세를 손전화로 교단 목사 장로들에게 신속히 알렸다. 극동방송에 장 목사님 부고 보도를 의뢰하고 국민일보에 부고 광고도 나가게 주선했다. 나는 남전도회 회원들과 등산갔다가 다친 허리가 아팠으나 장경재 목사님 임종기도와 관 운반 등 신앙의 아버지 장경재 목사님 장례에 적극 참여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부모나 어른들의 임종에 자식들이나 후배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자식의 임종을 받은 부모들은 복된 죽음, 곧 고종명 복도 누린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