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교회를 위한 성서학자의 길 걸어
이성휘(李聖徽)는 산 높고 물 깊으며 인심 좋은 고장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이씨(李氏)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숭실전문학교를 1913년 4회로 졸업했다.
졸업생 9명 중에는 이성휘를 비롯해서 이영휘, 변성옥, 오천영, 최응칠 등 5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 이렇게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졸업하자 숭실중학교 교사로 발탁되어 육영사업에 들어섰다.
1920년 미국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회 계통인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명문 프린스턴 신학교를 수료하고 여기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헨노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8년 귀국했다.
귀국한 이성휘는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서문밖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놀라운 교회 부흥을 이루었다. 뜨거운 민족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한편 그의 모교였던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마침내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과 담당표를 보면 이성휘는 성서문학을 강해했다.
한국 사람 최초로 평양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된 남궁혁 박사의 뒤를 이어, 그는 평양신학교 첫 한국인 구약학 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교육자로서 교육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성휘 교수는 1928년 1월 <신학지남>에 ‘신명기 강해’ 연재를 시작으로 1940년 9월 ‘출애굽기 강해’를 연재할 때까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신학지남>은 1928년 3월에 창간된 후 평양신학교 기관지로서 1937년까지는 계간으로, 그 뒤로는 격월간으로 나오다가 1940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이성휘 교수도 <신학지남>에 집필진으로 참여했는데 그의 저술 활동의 특징이라면 1930년 1월부터 1933년 7월까지 <신학지남>에 ‘천문강요’(天文綱要)를 연재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숭실전문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한 것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이들은 그가 특히 창세기와 천문학에 권위자였다고 한다. “그의 강의는 넓고 깊으면서도 오묘한 맛이 있었으며, 그의 발음은 정확하고 변재(辨才)가 다양해 호응이 좋았다.”
이성휘 교수는 <신학지남>에 몇 권의 책에 대한 강해를 연재했다. 가장 먼저 1928년 1-5에 세 번에 걸쳐 ‘신명기 강해’를 연재했다. 그 후 1928년 7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스물한 번에 걸쳐 ‘히브리서 강해’를 연재했고, ‘히브리서 강해’가 끝나자 ‘아가서 강해’를 1933년 9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총 열세 번에 걸쳐 연재했다.
이성휘 교수의 신학적 특징은 한마디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었다. 그의 성경해석은 당시의 청중과 호흡하며 민족과 교회의 현실을 고려한 접근이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