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보고 싶던 손주가 찾아왔다. 반갑게 맞이하고 껴안으며 말을 건넸다. “할머니 많이 보고 싶었지?” 조금 머뭇거리던 손주가 “아니 별로요.” 엉뚱한 반응이다.
엉뚱한 게 아니다. 사실이다. 보고 싶은 것은 할머니 마음이었지 손주는 아니다. 할머니는 현타(현실자각타임) 감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손주 육아 바보들이 있다. 손주 바라기가 되어 손주 돌봄 전담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직업을 가진 자녀들을 위해 일시적으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기본원칙을 정해 놓고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육아 방식 차이나 간식 주는 것, 교육방법, 옷 입히는 것 생각 차이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체력이나 분수를 모르고 전담하다가 체력관계로 힘이 부쳐 육아 번 아웃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 더 반갑다고 한다.
요새 어린이들 교육방식이 할머니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또 아이들 돌봄의 주체는 그 부모들이고 조부모는 서포터일 뿐이다. 내 방식보다 제 부모 방식을 따라야 한다. 조부모는 관찰자요 부드러운 조언자일 뿐이다. 결정권과 취사선택은 제 어머니들 몫이다.
미국에 사는 우리 외손자 다빈이는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고 따른다. 방학만 되면 15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외가에 온다. 할아버지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할아버지 냄새 좋아” 그러면서 따라다닌다. 손잡고 탄천길을 걷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에 꼭 슈퍼에 들른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골라 사 먹도록 한다. 그러면 콜라 사이다 캔디 아이스크림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즐긴다. (제 어미는 그런 것 잘 안 먹인다)
아무거나 먹인들 내 자식이 아닌데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 새끼 아닌데 손주들한테 인심 잃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늘 밖에 일이 있어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다. 하루는 다빈이가 내게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매일 늦어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순간 뭐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냐 할아버지는 밖에 중요한 일이 많으셔서 늦으시는 거야.”
“그럼 우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디이잉….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다음날 모든 일은 뒤로 하고 일찍 들어왔다. 다빈이는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와 재미있게 놀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날따라 할아버지는 금방 방에 들어가 잠이 들어 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찍 주무시면 늦게 들어오는 거랑 똑같아요”하며 섭섭해 했다.
내가 일찍 들어오라고 평생 노래를 불렀건만 들은 척도 안 하던 남편이다. 평생을 일에 치여 아내도 자식도 눈앞에 없던 남편이다. 그런데 손자 얘기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좀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일찍 귀가했지만 집에 일찍 들어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손주에게는 같이 해주는 할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 아내나 누굴 사랑한다면 함께 있어주고 배려해 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손주 돌봄도 화초를 기르고 어항을 가꾸는 것처럼 돌보는 그 자체로 만족을 해야 한다. 화초에 꽃이 피고 물고기가 잘 살아가면 그것뿐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더 이상 바라면 안 된다.
오늘은 미국놈 손주 다빈이와 동화책을 한가하게 같이 읽으면서 자식 키울 때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뿌듯한 묘미를 즐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피노키오의 동화책 마지막 피날레를 이렇게 덧붙여 봐도 좋을 것만 같다.
김영숙 권사
• (사)가정문화원 원장
• 반포교회 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