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출신 성내운(1926-1989) 교수는 평생 민주교육에 몸바친 한국의 존경받는 시대의 스승이요, 교육자였다.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사회활동을 했다. 1963년도에 백낙준 최현배 교수 배려로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문과대학장 학생처장 교양학부 부장 등의 보직도 맡았다.
연세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논문지도를 해준 김인곤 광주대 이사장의 추천으로 광주대학교 총장으로 민주교육과 자신의 참교육사상을 잘 교육했다. 연세교육대학원 학생원우회 회장 김인곤과 수석부회장인 나는 학생임원으로 교육과정 담당 주임교수인 성내운 교수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성내운 교수는 내 이름이 좋다고 사철에 따라 오동춘 오동하 오동추 오동동으로 부르라했다. 1956년도에 황정자 가수가 부르던 ‘오동동 타령’ 노래 속에 오동동 소리가 나와 내 이름은 라디오를 통해 자동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금강산 이름도 금강산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으로 산의 절경을 사철 자랑하듯 성내운 교수는 내 이름도 사계절 배경으로 부르게 참신한 말씀을 해 주셔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후 아동문학가 장수철(1916-1993) 시인도 날 보고 사철에 따로 부를 수 있는 내 이름이 좋다고 하시며 나를 사랑해 주셨다. 성 교수는 민주교육과 인권운동 참교육을 외치며 교육계를 바르게 하려고 애썼다. 유신헌법이 시행 중인 1978년도에 스스로 지은 ‘우리의 교육좌표 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신교육체제를 비판했다. 곧 수감되고 교수직도 해임되었다. 성내운 교수는 참교육을 부르짖으며 해직교수협의회 회장, 한국인권연합회운동협회 회장, 민주교육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맡아보며 자신의 교육신념을 펼쳐나갔다. 군사정권의 교육비판으로 늘 수사관들의 수배 속에 피신하며 살았다.
내가 교사로 근무하던 대신고교 김한수 교장이 고3 졸업반 학생들에게 성내운 교수를 모셔서 교양 특강을 베풀었다. 성내운 교수는 고3학생들에게 대학진학의 성공과 나라 겨레 사랑의 투철한 애국심을 심어 주시며 시를 사랑하자 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시를 읊기 시작했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 소년 창간호’를 비롯 주요한의 ‘불놀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초혼’ 이육사의 ‘절정’ ‘청포도’ 심훈의 ‘그날이 오면’ 윤동주의 ‘참회록’ ‘별헤는 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유치환의 ‘바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노천명의 ‘푸른 오월’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이은상의 ‘가고파’ 이병기의 ‘난초’ 시조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의 대표작까지 30여 편 시를 줄줄 암기 낭송했다.
성내운 교수의 진지한 시와 시조를 고3 학생들은 감명 깊게 잘 들었다. 김한수 교장선생은 어느 날 오늘의 서울경찰청 근처 ‘진주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곁에 앉아있는 내게 서울사대 교육학과 대학생일 때 알바를 구하기 위해 종로 1가에서부터 5가까지 가게마다 들어가 일자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다 거절인데 어느 술도매집 일꾼들이 장난삼아 이 세수대야만한 크기의 그릇에 담긴 술을 다 마시면 일자리를 주겠다 말한 것이다. 술은 마실 줄 모르나 알바를 구할 마음으로 그 큰 대야만한 그릇의 술을 억지로 다 마시고 까무러쳤다고 한다. 반죽음이 된 것이다. 일꾼들은 당황해 주인집에 건의해 자녀교육의 가정교사 자리 알바를 구해주었다. 목숨 걸고 일자리를 구한 대학시절 겪은 역경의 고학담을 내게 말해 주었다. 의지와 신념이 강한 대학생이었음을 말해 준다.
4.19 후 민주당 정부 문교부 정책실장일을 맡았을 때 한글학자 최현배 박사가 문교부가 한글전용정책을 잘 펴달라고 밤 한 말을 사가지고 성내운 교수댁을 방문한 이야기도 했다. 민주교육 참교육 신념이 투철한 한 시대의 스승 성내운 교수는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존경받고 있다. 그리운 교수님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