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이성휘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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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압력 속에서 흔들리던 평양 서문밖교회 섬겨

평양 서문밖교회는 1909년 장대현교회로부터 분리해 창설된 이래 승승장구해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3천 명의 교인이 운집하는 큰 교회가 되었다. 그동안 시무하고 있던 임종순 목사가 1935년에 대타령교회로 옮겨가면서 이성휘 목사가 당회장으로 돌보았다.

그는 성심을 다해 목회했다. 자그마한 키에 둥근 얼굴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듯한 몸매에 빛나는 눈과 그의 해박한 지식의 설교는 그동안 부흥사의 목회로 들떠 있던 신도들의 신앙을 건전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영향을 끼쳤다. 이성휘 목사는 신학교 재직 시 서문밖교회에 인접한 신학교 구내 사택으로 이사하게 되어 가족이 모두 서문밖교회에 출석했다. 교회에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성휘 목사에게 임시 당회장의 수고를 부탁하곤 했다.

많은 사람이 이성휘 목사에 대해 성품이 유약한 것이 약점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에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신학교 안에서 이를 옳다고 여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인 교수 중에서 박형룡 목사나 김인준 목사 같은 분은 시종일관해 반대편에 섰다. 이성휘 교수는 주기철 목사를 마산 문창교회로부터 모셔오는 데 협력해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지지했다. 그래도 신학생들의 마음에는 그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성휘 목사가 처음에는 반대하는 것 같더니 신사참배 강요의 도수가 강해지고 압력이 심해지자 생각을 바꾸어 신사참배 찬성 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1938년 9월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신학교 당국에서는 무기한 휴교를 선언하고 옥쇄(玉碎)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은 채 얼마의 세월이 흐르자, 신학교가 없어 목사가 양성되지 않는다면 교회 사역자가 고갈되고 말 것인즉 목사 양성 교육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중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하는 신학교가 1940년 2월 9일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고 개교했다. 이 학교를 흔히 평양신학교라고 부른다. 박형룡 목사와 김선두 목사는 중국의 만주 심양으로 가서 봉천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38년 가을 학기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진리를 굽힐 수 없다는 신념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 시기에 아들 이세열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성휘 목사는 평양 근교의 자산이란 곳으로 옮겨 거주했다. 이성휘 목사는 그곳의 자산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섬기면서 농사일과 특히 목수 일로 소일했다. 평양신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1940년 2월에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이성휘 목사가 교수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성휘 목사는 8·15 해방을 맞아 다시 서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해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신학교 교장이었던 채필근 목사는 친일파라는 죄목으로 감금되고, 12월에 새로운 신학교육의 중임을 띠고 김인준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되지 않아 평양신학교는 공산정권의 기독교 탄압정책 때문에 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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