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연지의 연못가에 심긴 복음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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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을 넘어 동촌으로, 연동교회의 시작

연동교회①(연지동 136-12)

연동교회라고 하는 명칭은 이곳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의 서울에는 동쪽과 서쪽에 연못이 하나씩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 동쪽에 있었던 연못이 현재 효제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이곳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이 유명했다고 한다. 따라서 동쪽에 있었던 연못을 연지(蓮池) 즉 연꽃이 많이 있는 연못으로 불렀고, 그것으로부터 연지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동쪽의 연못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동촌(東村)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주로 서민과 천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물론 동촌은 임금이 살고 있는 궁을 중심으로 방위각에 따른 마을이름이기도 하다. 해서 장안에는 방위각에 따라 동촌, 서촌, 남촌, 북촌이 있었다. 동촌에는 백정을 비롯한 천민과 서민들인 무당, 채소장수, 포목장수와 같은 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또한 연지동을 중심으로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한 다음에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으로 망명해왔을 때 그들이 살았던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명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해 명인촌(明人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같은 장안이지만 이 지역은 천민과 서민, 그리고 군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고, 망명한 중국인들까지 섞여서 살던 곳이다. 왕궁과 가깝지만 주로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며, 게다가 명나라가 망한 다음에 망명해온 중국 사람도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왕궁이 가깝기 때문에 궁궐과 가까운 쪽으로는 양반이나 일부 귀족들이 살기도 했다. 즉 천민과 양반들이 사는 곳이 겹치기도 한다.

동촌인 이 지역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10여 년이 지난 1894년이었다. 조선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모두 정동에 정착했다. 정치적,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 외국인들에 대해서 배타적,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제한된 공간에서 거주하면서 활동하도록 유일하게 허락된 곳이 정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에게는 포교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자신이 집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사실상 포교의 시작이었다.

연동교회의 시작 배경에는 1894년 정동을 벗어나서 전도를 시작한 무어(S. F. Moor, 모삼열) 선교사가 있다. 그가 조사들(金泳玉, 千光實)과 함께 장안을 돌면서 순회전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고, 개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 연지동에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고, 여기에 정동에서 언더우드의 지도를 받던 초기 신자들이 동참해 연지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즉 언더우드 사랑방에 모이던 공동체는 서상륜에 의해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형성된 것인데 선교사들이 입국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언더우드는 서상륜의 요청에 놀랐고, 그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랑방에서 은밀하게 모임을 가졌다.

시간이 흘러 선교가 조금씩 허락되면서 정동을 벗어나서 전도를 시작했고, 먼 곳으로부터 출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895년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 모임을 갖고 있던 공동체에 함께 했던 몇몇 사람이 그레함(Graham Lee, 이길함)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곳 연지동 136-17의 작은 초가를 마련하고 무어 선교사의 양육을 받던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한 것이 연동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공동체가 이곳에 자리를 잡자 신자가 계속해서 늘어남으로 1896년 현재의 연동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의 초가를 20평 규모의 예배당으로 개조를 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후 1900년 게일(Gale, J. S., 奇一) 선교사가 이 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면서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특별히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신자가 늘어나게 되었는데 예배당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게 됨으로써 수차례 증축을 해야 했다. 또한 부속건물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집들을 주변에 마련해 주일학교와 소학교의 교사로 사용했다. 이렇게 교회가 사역의 영역을 넓히면서 필요한 주변의 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신자가 500명을 헤아리게 됨으로써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1907년 효제동 47번지(기독교 100주년 기념과 동쪽)에 300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그곳에 133평의 목조건물을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한옥과 양옥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것으로 지붕을 양철로 했으며 기본적으로는 목조건물이었다. 규모면에서도 당시에 구경거리가 될 만큼 크고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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