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국교회 재건과 신사참배 회개 둘러싼 갈등
이성휘 목사는 신사참배 하는 평양신학교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칩거로 들어가 신학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리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이성휘 목사는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눈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주의 종으로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켰다.
이같이 일제와 투쟁을 계속하면서 드디어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날, 1945년 8월 15일 삼천리 이 민족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한 아름씩 안고 사람들은 교회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급속도로 우후죽순처럼 힘있게 뻗어 나가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성장해 나가는 교회에 필요한 수급책은 교역자 양성이었다.
1945년 조국 광복과 함께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가장 서둘러 일어난 곳이 북한의 교회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8·15의 조국 광복을 맞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재개되면서 학생들은 하수구리에 있는 신학교의 건물을 되찾아 사용하면서 수업이 속개되었다. 이 건물은 1908년 미국 시카고에 살던 매코믹 여사가 한국 선교사업에 특별한 관심으로 거금을 희사해 평양에 서양식으로 지은 최초의 큰 건축물로서, 진리 탐구의 전당으로 십자군을 양성하는 수도장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북한에서도 종래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이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옥고를 겪으면서도 끝내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많은 목회자가 평양 감옥에서 출옥했기 때문이었다.
출옥한 20여 명 목회자는 옥중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들어 2개월간 합심 기도했다. 그 결과 앞으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기본 원칙을 정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신사에 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痛悔自服)한 후에 교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에 부응하기 위해 서천, 월곡동교회에서 1945년 11월 14일 연합 교역자 수양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출옥 성도들이 한국교회의 재건원칙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재건의 열의는 냉정한 현실 앞에 맥을 못 추게 되었으니 딱한 일이었다.
그것은 옥중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밖에서 교회를 지킨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나 권징(勸懲)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그 누가 강요해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심지어 출옥 성도들을 향해 율법주의적 독선자라는 공박이 일어났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진로가 쉽지 않음이 예견되었고, 결국 이러한 징조는 고신파 발생의 근원이 되었으며, 한신파 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