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27) 빼앗기고 불타도, 교회는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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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과 재건 속에 한국장로교 역사의 중심이 된 연동교회

연동교회 ② (연지동 136-12)

특이한 예배당 건물로 장안에 유명세를 떨쳤던 효제동 예배당은 1942년 ‘남선전기주식회사’에 사실상 빼앗기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또 다른 형태의 탄압이었다. 갑자기 예배당을 잃게 된 연동교회는 마땅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 다시 6.25사변을 겪어야 했다. 

예배처소를 잃어버린 채 10년이 넘게 지내다가 6.25전란이 끝난 후인 1954년에 이르러 현재의 예배당이 있는 곳에 100평 규모의 벽돌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예배당은 종탑이 있는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이것은 이 교회가 지은 다섯 번째 예배당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기에 기념감사예배와 함께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예배당은 197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건물을 완전히 헐고 1977년에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재의 예배당을 지었다. 연동교회를 찾았을 때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여느 예배당과는 많이 다른 디자인이다. 예배당 외부에서 느끼는 것은 붉은 벽돌로 기둥을 대칭을 이루게 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예배당의 모습을 탈피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살렸다. 건물 내부도 부채꼴로 좌석을 배치함으로써 회중교회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강대상 뒤편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와 현대의 조화를 유도하고 있다.

연동교회를 찾아보면서 정리해야 하는 것은 1959년도 장로교 합동 측과 통합 측의 분열 당시 통합 측의 중심이 되었던 연동교회는 단지 한 교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의 중심에 있는 교회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이 교회에서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부터는 연동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1894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가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136-17(현 위치)에 초가 한 채를 구입해서 예배처소를 마련한 것이 이 교회의 출발이다. 이렇게 시작한 연동교회는 첫 번째 예배당에서 1898년 연동소학교를 설립해서 남학생 10명을 모집했다.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으로 부임할 때는 이미 신자수가 200명이 넘었다. 예배당이 비좁아서 신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연지동 136-12, 27번지에 한옥을 구입해서 개조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901년에는 중학교 과정의 학교를 교회 부속건물에서 개교했다. 이 학교는 1902년에 예수교중학교로 개명해 연지동 1번지로 이전했다. 이 학교는 정동에서 언더우드가 시작한 예수교학당(후에 경신학교)의 역사를 잇는 것으로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 학교와 관련해서는 혜화동을 답사하면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연동교회 주변에는 장로교 선교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부가 사용하는 건물이나 선교부 사업을 위한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도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몰락해 가는 조선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때 독립협회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투옥되어 있는 지도자들이 있음을 알게 된 게일은 한성감옥으로 그들을 찾아갔으며, 옥중에서 전도해 개종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출옥한 이들은 게일 선교사가 목회하고 있는 연동교회를 찾아와서 계속적으로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했고, 국가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게일 선교사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월남 이상재 선생을 비롯해서 투옥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옥중에서 개종한 이들이다. 그들은 게일로부터 지속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위기의 조선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되어서 각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1906년에는 신자가 증가하면서 예배드릴 공간이 절대 부족해 여자는 예배당에서, 남자는 경신학교에서 각각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지 못함으로 1부와 2부로 예배를 나눠서 드려야만 했다. 즉 오전 9시에는 여자, 10시에는 남자가 예배를 따로 드리는 것으로 비좁은 예배 장소를 해결해야 했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주일 평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1천200명이었다고 하니, 예배당 공간은 태부족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이미 대형 교회가 출범했다고 할 수 있다.

1909년에 이르러서 연동소학교는 정신여소학교로, 연동남소학교는 경신남소학교로 각각 개명했다. 이것은 다시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발전해갔다. 그런가 하면 교회 역사에서 아쉬운 것도 없지 않다. 1910년에 있었던 일로 한 교회 안에서 양반과 천민이 함께하는 교회의 상황에서 양반들이 갖는 불만이 컸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서울 장안에 있는 교회들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였다. 결국 이 교회의 일부 양반들이 이탈해서 묘동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양반중심의 교회인 셈이다. 하지만 훗날 복음의 능력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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