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부활신앙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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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귀족 계급층이었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과 영생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현세 중심의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탓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했고 죽이기를 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개념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공존이 불가능합니다. 부활에 대한 지식과 신앙은 본질상 궤를 달리할 뿐 아니라 중립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은 공통된 질서이고 법칙입니다. 예외자가 있을 수 없고, 시차가 있을 뿐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고 죽음을 당당히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부활신앙의 소유자만 가능합니다.

무신론 철학자 하이데커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 너머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어서 지향점이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1884년 독일에서 니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허무주의 철학자의 태두였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서 허무하다 무의미하다 희망이 없다 그리고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철학의 뼈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은 죽었다 라고 선언했고, 기존 가치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11년 긴 세월 정신질환으로 투병했고, 55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사망원인은 뇌졸중이거나 매독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은 죽었다던 니체는 죽었고, 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신학은 신을 논하는 학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으로 영원한 신을 논하는 것은 항상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지식으로 논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신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존재의 한계를 적시합니다. “꽃처럼 시들고 그림자처럼 지나간다”(욥 14:1-2), “한 뼘 길이이며 허사다”(시 39:5), “신속히 날아간다”(시 90:10), “모든 육체는 풀이다”(사 40:6), “안개다”(약 4:14)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 모든 것들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진입하는 문을 활짝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요 11:11)고 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셨습니다.

“믿느냐”의 의미는 일회적이 아닌 지속적으로 믿느냐 입니다. 시제상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을 아우르는 고백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수천수만 번 부활에 관한 선포를 했고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부활을 믿는가 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가설이고 허언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라고.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1-22) 마르다의 답입니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확신과 고백은 내 것이라야 하고 동시적이라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십자가 사건은 패배와 절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셋째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고 생명과 영원에로 잇대는 길을 터주셨습니다. 부활신앙이 확립될 때 부활의 소식을 선포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사셨습니다.

박종순 목사

<증경총회장, 충신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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