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세브란스,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아산병원, 삼성병원 등 5개가 있다. 이 다섯 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병원을 선도해 가는 병원은 세브란스이며 한국 최초 서양식 병원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1884년 4월 10일 한국에 온 알렌(1858-1932)이 그 무렵 갑신정변에 칼맞은 민영익 대감을 살려내는 의료봉사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고종은 그 고마움으로 광혜원 병원을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지어 주었다. 고종은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뜻의 광혜원을 16일만에 병원 이름을 제중원으로 새로 지어주었다.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알렌은 언더우드(1859-1916)와 함께 의학 교육의 기초도 잘 다듬었다. 알렌이 외교관으로 제중원에서 물러나자 고종의 재정후원도 끊겨 제중원의 운영권은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돌아왔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된 에비슨(1860-1956)은 제중원 4대 원장으로 부임해 압박 받는 제중원 병원과 의학교육 재정을 위해 언더우드와 함께 미국에 갔다. 뉴욕 카네기홀 선교대회에 출석해 무지한 백성이 많은 한국선교와 제중원의 어려운 재정난을 호소했다. 이때 석유재벌 루이스 세브란스(1838-1913)는 엄청난 거금을 제중원에 기부했다.
1904년 오늘의 서울역 근처에 서양식 병원을 짓고 에비슨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짓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운영했다. 언더우드가 영어도 가르치고 서양의학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도 했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중에 의사면허 제1호 김필순(1876-1919)은 에비슨의 오른팔 노릇을 하며 의학서적 한글화에 열중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와 함께 애국비밀단체 신민회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해 안창호와 독립운동에 열중했다. 안창호와는 의형제로 지냈다. 김필순 누이동생 김순애(남편 독립운동가 김규식) 독립운동가 조카 김마리아(1891-1944)도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무렵 안타깝게도 김필순은 일제 간첩에 의해 독살되었다. 의사 면허 제2호 박서양(1885-1940)은 백정의 아들로 천대받는 신분이었으나 아버지 박성춘과 선교사들의 기도와 힘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료활동과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1907년에 입학 1911년에 세브란스 제2회 졸업생 이태준(1883-1921)은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에서 독립정신을 익히고 몽골 슈바이처로 활동하며 독립전선에 앞장섰다가 러시아 백군에 피살되어 38세 나이로 순국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관(2010년 설립)이 서 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선교 의료활동에 앞장서며 의학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세브란스전문학교와 언더우드 설립 경신학당 대학부(안창호 배출함)는 뒤에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며 양교 병합문제가 일제시대와 광복 후까지 논의되다가 드디어 1957년 1월 5일자로 연희의 ‘연’과 세브란스의 ‘세’를 합쳐 연세대학교가 발전적으로 새로 태어났다. 서울역 앞 세브란스터엔 수십층 연세재단 빌딩이 서 있다. 1962년도에 신촌으로 옮겨온 세브란스병원은 세계적인 큰 병원으로 날마다 더욱 발전해 가며 한국 전국적인 의료계를 선도해 가고 있다.
2005년 5월 4일 세브란스병원은 지상 21층의 본관 건물을 건축했다. 뒤이어 심혈관, 암병원, 안과병원, 재활원, 어린이병원 등의 병원 시설을 잘 갖췄다. 최신기계를 잘 갖추고 환자진료와 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연세의료원은 의과대학 치과대학 간호대학을 통해 전통 깊은 세브란스병원과 함께 한국의 의료계를 잘 선도해 가고 있다. 지난해 제중원부터 140주년 되는 세브란스병원이 NCSI 산업군 전체에서 4년간 1위의 영예를 안고 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 중심 연세기도 속에 힘찬 세브란스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