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날로 더 발전해 가는 명문 서울 용문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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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남녀는 다닌 고교 모교가 있다. 나의 모교는 현재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용문(龍文)고교이다. 경남 함양중학을 졸업하고 오문환 막내 숙부 배려로 그때 강문(康文)고교에 수석 입학했다. 돈암동에서 한성여고 뒤 고갯길을 걸어 창신동 고색이 창연한 절간같은 학교에 등교했다. 1946년 11월 19일 신당동에서 출발한 성도중학교가 6.25를 거치며 진일보 발전해 1952년 11월 21일 옮겨온 학교 위치가 창신동이다. 갑부 임종상 씨 99칸 집을 교실로 쓴 것이다.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면학에 열중한 학생들이 명문대 진학률이 좋았다. 3회 선배가 고려대에 수석 입학했다. 당시 강문고 실력을 인정한 고려대는 추천입학도 2사람정도는 받아 주었다.

우리 5회 졸업생 진학률을 보면 주․야간 180명 중에 서울대 2명, 고려대 4명, 연세대 2명이다. 김영욱, 한경수, 박인영 교장을 거쳐가며 단국대와 재산송사도 겪으면서 학교는 폐교 직전에 이르렀다. 단국대에 패소해 1964년 4월 30일 4.19 원흉 이기붕 비서실장을 지낸 박금선 이사장이 계약금 100만 원만 걸고 안암동 폐교된 조양중고교 폐허 같은 자리로 강문고교가 이전했다. 

강문고교도 폐교 직전일 때 교육에 큰뜻을 품은 김용주(1905-1985 초대 참의원)가 학교를 3천 만에 샀다. 그리고 현영원(1927-2006 이사장), 김문희(1928-2025 교장) 내외가 학교를 잘 발전시켜 보라 했다. 1966년도에 용문학원 재단이 설립되고 교명도 용문(龍文) 중․고교로 바꿨다. 그리고 교사를 5층으로 올리고 과학관, 체육관, 강당, 교사신축 등 교육 공간 시설부터 완벽하게 갖추었다. 5천800평 운동장도 잔디구장으로 만들었다. 1970, 1980년대 대학진학률이 전국 1위 수준에 오르자 옛날 서울 제2경기고교로 찬사를 학부형들이 보였다. 내가 강문고교생이었을 때는 입학시험도 전기 후기로 나누어 보았다. 그때 공립 5개 명문고교는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교였다. 사립 5개 명문고교는 배재, 양정, 중앙, 보성, 휘문 등이었다. 1970년대 고교 평준화교육으로 서울시내 인문계 고교는 모두 명문고교가 되었다. 내가 오래 근무했던 대신고교는 1977년도 1988년도 두 번이나 서울대 수석합격자를 배출했다. 연고대도 10여 명씩 입학했다. 배구 축구도 명문이던 대신고교는 공부도 명문학교였다. 나는 강문고교 초기 김영욱 교장이 연희대(현 연세대), 외솔 최현배, 위당 정인보 교수께 자문해 소개 받은 명영준, 이흥렬 음악인들이 작사, 작곡한 용문교가가 아름다워 애교심이 솟구친다.

1절:삼각산 정기서린 서울 중앙에/한송이 피어나니 그 이름 용문 빛나는 배움의 길 닦고 닦아서/꽃피고 잎피어서 열매를 맺자//2절:한강수 호세 뻗은 고성 진두에/한쌍배 새로 뜨니 그 이름 용문 참다운 배움의 길 사명을 다해/우리 겨레 앞길에 행운을 맺자//

가사와 곡이 부를수록 아름다운 용문교가를 재학생이나 동문들이 다 기쁘게 씩씩하게 불러야 할 것이다. 나는 학에부장을 하며 처음 만든 교지(康文)에 나의 첫소설 ‘낙제’도 실었다. 은사님으로 정기호(국어), 김상남(영어), 권영상(사회), 이화용(음악) 선생님이 그립다. 근래 동문들을 보면 교육계에 장수영(5회) 포항공대 2대총장, 용문고교 황진호(39회) 22대 첫동문 교장, 문협고문 오동춘(5회) 시인, 정치계 우상호(29회) 4선의원, 음악계 조영남 가수, 국방계 김운용(예) 육군대장, 연예계 백일섭 배우, 체육인 황선홍 축구선수, 개그맨 유재석 방송인, 이밖에도 한양대 조성민 명예교수, 구자관 흥사단 단우 등 기라성 같은 동문들이 7만 명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 자랑스런 용문고교 동문들은 명문 우리 모교를 사랑하며 선후배들이 튼튼하게 뭉쳐 나라와 겨레를 더욱 크게 빛내도록 해야 하겠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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