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 연지동까지… 선교와 교육이 세운 경신학교의 뿌리
경신학교 址 ① (연지동 1번지)
언더우드학당(현 경신고등학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경신학교의 시작은 처음 선교사들이 터를 잡았던 정동에서였다. 경신학당은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처음에는 학교라기보다는 길거리에 거처 없이 돌아다니는 고아를 돌보는 것이 그 효시였다. 1885년 언더우드가 주변에 많은 고아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한두 명을 거둬 자신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게 하면서 돌보았지만 먹이고 재우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곧 경신학교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집(정동 32)에서 시작한 학당에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정동에서의 경신학당은 넓은 공간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학당을 현재 이화여고의 동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화박물관 터 주변의 한옥으로 자리를 옮겨 학교를 계속했다. 경신학당은 시작한 이듬해인 1886년 5월 11일 언더우드학당(통상 구세학당으로 불림)으로 설립예배를 드리면서 초대 학당장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취임했다. 이렇게 시작한 경신학당은 고아들이 공부한다고 해서 공원학당이라는 별칭과 언더우드가 학당장을 사임한 후 민로아 선교사가 학당을 맡으면서 일시적으로 ‘민로아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891년에 교명을 ‘예수교학당’으로 바꾸면서 입학연령을 10세로, 수업기간을 5년으로 하는 학제를 채택해서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동에 자리잡고 있던 장로교 선교부가 덕수궁의 확장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의 활동공간이 제약을 받게 되면서 정동에서의 철수가 결정되어 잠정적으로 학교도 폐쇄하게 됨으로 1897년 10월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어간에 장로교 선교부가 종로의 연지동으로 이전을 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상황에서 1901년 게일 선교사가 연동교회가 처음으로 사용했던 연지동 136-17의 예배당 건물인 한옥에서 중학교 편제로 재 개교를 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경신학교의 역사를 이어가는 연지동시대의 시작이다. 그 일년 후인 1902년 연지동 1번지의 한옥을 구입해 교실과 숙소로 개조해서 수업을 하면서 일시 ‘예수교중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1905년 경신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하고 있다.
학교체제를 갖추면서 교사(校舍)가 필요하게 되어 1906년 사용하고 있는 건물 옆에 붉은 벽돌 고딕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모든 비용을 미국인 웰즈(John D. Wells)가 기부했고, 따라서 건물명을 ‘존 디 웰즈기념관’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이 건물도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들의 수요를 따를 수 없어서 1910년 양쪽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해서 상당한 규모의 학교건물이 되었다. 이 웰즈기념관은 경신학교가 이곳에서 일제의 박해로 옮겨야 했던 1941년 3월까지 교사로 사용했다. 이 웰즈기념관이 있었던 곳은 현재 현대그룹본사가 사용하고 있는 쌍둥이 빌딩이 있는 곳이다.
또한 학생들의 실습과 자급을 위한 일터가 필요했기에 학교 건물 옆(연건동 195-10)에 실습장을 겸한 일터를 위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연건평 210평 규모의 르네상스식으로 지었는데 여기서 학생들의 직물과 봉재기술을 익혀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1914년 경신공과전문학교를 시작했다. 사실상의 상급학교인 전문과정의 학교를 시작했지만 이 학교는 1년 후에 연희전문학교로 통합시켜서 운영하게 되면서 사라졌다. 이 건물은 현재 여전도회관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다.
웰즈기념관을 중심으로 주변에 학교가 필요로 하는 건물들을 증축 내지는 신축을 하면서 경신학교 타운이 형성되었다. 그 중 하나가 ‘포스트기념당’인데 이 건물은 1925년에 지은 것으로 미국인 포스트(James S. Post)가 건축을 위한 비용을 기부함으로써 지을 수 있었기에 완공후 ‘포스트기념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지금은 만날 수 없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