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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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따뜻한 사랑을 주셨던 외삼촌께서 6.25 전쟁으로 인해 터전을 잃으시고 시골에서 병원을 하셔서 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하셨고, 언니가 대학도 가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가 생활비도 내지 못하고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눈치가 보여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고 많은 고민 끝에 학업을 끝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원주에 계신 부모님께로 돌아갔다. 부모님께 나의 사정을 말씀을 드렸으나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늦었으니 이제 자거라’  하시고 잠자리에 들으셨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나 서울 좀 갔다 오겠다’라고 하시며 집을 나가셨다. 이틀 후에 오시더니 서울문리대부설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기로 했으니 서류를 준비하라는 말씀에 너무도 놀라서 ‘꿈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바로 아래 여동생(영숙)도 서울공대 화공과에 입학이 되었다. 나는 서류준비를 한 후 아버지와 함께 학교등록을 하러 서울로 떠났다. 문리대를 찾아가 등록을 하려고 서류를 받아보니 등록금이 모자라서 등록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모자란 돈을 빌리러 사방 다녀보았으나 빌릴 데가 없었다.

마침 아버지 제자이며 종합고등학교에서 합반해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던 남학생이 아버지를 뵈러 다른 친구들과 같이 왔었다. 그 학생은 서울공대에 다니고 있었다. 말하기 힘든 등록금 이야기를 하자 서울공대 다니는 김 학생이 빌려주겠다고 해서 등록을 하게 되었었다. 고맙기는 했어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자취하려고 청량리에 구석진 초가집에 부엌도 없는 사랑방에서 지냈다. 동생은 가정교사로, 나는 뜨개와 수 놓는 것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공부하기가 힘은 들었어도 나를 아껴주는 동생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다.

몇 달 후! 원주에 있던 종합학교가 춘천으로 복귀가 되면서 부모님께서도 춘천남자중학교에서 아버님을 위해 학교 관사를 임시로 판잣집을 지어주어서 가족들이 관사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55년 2월 졸업을 하고 1955년 4월 9일에 결혼을 했다. 제대로 된 결혼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고 집도 없는 상태고 돈도 없는 상태였으나 정성으로 결혼준비를 해 주셨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신랑에게 줄 예물이 준비되지 않아 아버지께서 돈을 어렵게 빌려서 좋은 시계를 사 오셨었다. 우리를 위해 학비 마련하시느라 늘 빌리시더니 결혼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고생하셨던 부모님을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고, 동생들을 두고 가는 마음이 쓰리고 아파서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4년 동안 시집에서 살면서 많은 후회도 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도 내가 결혼한 후 아버지께서 집이 폭격으로 타버린 터 위에 집을 지으셨고, 강원도 문교부 중등부 장학사 임기를 마치신 후 춘천 남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셨다.

수년이 지난 후! 아버님께서 교직 생활 정년 은퇴하시고 서울로 오셔서 또다시 어려움으로 고생을 하셨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늘 걱정만 했을 뿐 나 자신의 삶이 힘들어 도울 수가 없었던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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